틀림없이 방치된 양곡창고이었다.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은 듯 벽체는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누렇게 색이 바랬고 입구에 거대하게 버티고 선 철문은 고철 덩어리처럼 녹이 슬어있었다.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철문이 끼이익 거칠게 신음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창고가 아니라 빈티지한 대형 레스토랑이었다.
17년 전 봄, 광활한 허브농장으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 후라노시에 갔다가 맛집이라는 소문에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 레스토랑은 옛 양곡창고였다. 작은 스테이지가 있어 공연도 할 수 있는 홀은 넓었고 부분적으로 복층도 만들어 홀을 내려다보며 식사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그때 먹었던 메뉴는 기억나지 않지만 세련되고 고급진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여전히 잔상(殘像)처럼 남아있다. 당시엔 버려진 양곡창고의 변신이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삼례문화예술촌 옛 양곡창고 카페
일본 사람들은 쓸모없는 건물을 재활용하는데 나름 재주를 가졌다. 홋카이도만 해도 그런 곳이 차고 넘쳤다. 일본 최초의 맥주공장이었지만 시설이 낡아 삿포로시의 애물단지였던 맥주공장은 ‘삿포로 팩토리’라는 이름의 복합 쇼핑몰로 변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러브레터’로 널리 알려진 오타루시의 운하를 따라 조성된 물류창고는 카페, 식당, 공예품 상점으로 개조돼 글로벌 관광지가 된 지 오래다. 이런 나라에서 양곡창고의 변신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젠 한국도 소도시나 시골의 옛 양곡창고도 카페와 베이커리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창고관리에 애를 먹는 농협과 감각 있는 청춘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충남 예산군 응봉면 응봉상회
한국도 일본처럼 양곡창고는 골치 덩어리다.
진작부터 대단위 미곡종합처리시설(RPC)이 농협이나 민간 도정 업체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양곡창고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50년, 100년 된 양곡창고를 현대화된 시설로 개조하기도 해봤자 쌀의 품질을 보장할 수도 없다. 이래저래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런 양곡창고의 쓸모를 발견한 것은 문화기획자들이었다.
전주 삼례문화예술촌은 2013년 100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일제 강점기 양곡창고의 팔자를 고쳐놓았다.
‘양곡창고에 예술을 채우다’를 모토로 미술관, 책 박물관, 목공소, 디자인 박물관과 문화 카페도 만들었다. 전국에 양곡창고 카페가 확산된 것은 삼례문화예술촌의 공이 컸다.
삼례문화예술촌 창고 책 박물관
여기에 옛 양곡창고는 문화공간이나 카페로 바꾸기도 쉬운 편이다. 우선 네모반듯하고 천장이 높아 복층을 만들기 좋고 습기를 막기 위해 빗살 모양으로 덧댄 내벽의 목재와 천장의 트러스 구조는 적은 비용으로 인테리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도고 창고 내부
지난 주말 아산을 지나다 들린 도고면 ‘창고카페‘도 양곡창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지역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도고온천 단지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이 카페는 창고 카페 리모델링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복층을 만든 것 외에는 별달리 손을 대지 않고 의자와 탁자만으로도 복고풍 콘셉트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뉴트로'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종 에브리선데이 카페
세종 연서면에도 2년간 방치된 건물면적 100평의 양곡창고를 카페로 개조한 ’에브리데이선데이‘가 성황이다. 카페 주인은 35년 된 창고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먼저 임대를 제의해 카페로 만들었는데 모 커피업체의 TV 광고 배경이 되면서 명소가 됐다.
충남 예산 수덕사 근처의 유양창고는 양곡창고를 베이커리 카페로 만든 케이스. 이곳은 도고 창고 카페와 달리 외부는 크게 손을 보지 않았지만 내부는 완벽하게 탈바꿈시켜 양곡창고라고 보이지 않는다.
양조장을 개조한 카페 '광덕양조장' 내부
요즘은 농협 양곡창고뿐만 아니라 옛 양조장이나 심지어 축사까지 카페로 만들어 청춘들을 유혹한다. ’ 호두‘의 고장 천안 광덕면에는 카페 ’광덕양조장‘이 있다.
이름엔 술 냄새가 풍기지만 6.25 전쟁도 지켜볼 만큼 오래된 양조장 공간을 개조해 카페로 만들었다. 노란색 외벽에 난 황토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널찍한 공간에 자연광이 들어와 따스한 느낌이다.
카페 석실리
청주 남이면에는 동네 이름과 같은 ’석실리‘라는 카페가 있다. 베이지색 톤에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가 돋보이는 석실리는 축사를 개조해 카페로 만들었다.
마당에는 장작불 옆에서 차도 마실 수 있으며 단체 손님은 농가주택을 리모델링한 별채에서 모임도 가질 수 있다. 30대 후반의 카페 주인이 직접 개조해 놀랄 만큼 저렴한 예산으로 멋진 카페를 만들었다.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 운하 창고 카페
최근 카페도 점점 대형화되고 있고 주차 공간도 넓어야 손님이 찾아온다. 객단가를 높이기 위해선 빵 맛도 중요해 대형 오븐을 설치해야 한다. 그래서 카페를 오픈하려면 땅값 포함 건축비, 인테리어 비용으로 수십억이 든다.
하지만 방치된 양곡창고를 카페로 활용하면 이 점이 많다. 주로 단위농협이 주인이다 보니 임대료도 저렴하고 창고 외부는 그대로 살리기 때문에 감각만 있다면 내부 리모델링에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양곡창고 카페가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벽돌을 찍어낸 듯 비슷한 모양의 양곡창고는 다른 창고 카페와 차별화하기 힘들다. 마치 대기업 카페 프랜차이즈점처럼 동네만 옮긴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엔 신선해 보이지만 경쟁적으로 이곳저곳에 생기면 식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옛 양곡창고 카페야말로 참신하고 창의적인 발상이 더 필요한 곳인지도 모른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박상준 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