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적할 땐 눈 덮인 지리산 노고단으로.

by 박상준

지리산은 참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지리산 국립공원은 산세의 웅장함에 있어서도 으뜸이다. 해발고도 1,000m 이상 되는 준령이 20여 봉, 그밖에 수많은 대소 산봉이 서로 어우러져 거대한 산악군(山嶽群)을 형성한다.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조선시대 지리서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라"고 했다.

성삼재를 올라가면서 새삼 지리산을 실감했다. 성삼재는 지리산 능선 서쪽 끝에 있는 고개로, 높이 1,102m이다. 마한(馬韓) 때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던 고개라 하여 성삼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천은사 입구에서 시암재를 지나 성삼재까지 10km를 올라가다 보면 지리산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구불구불 도로를 따라가는 동안 내내 지리산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겨울에 버스를 타고 성삼재를 올라가는 길은 스릴의 연속이었다. 길가에 눈이 쌓여있는 좁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버스가 회전할 때마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꼈다.

성삼재 휴게소에 내리자 찬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한 휴게소라 보니 주변이 장관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것은 '카페'였다. 1천 m 고지의 휴게소에도 '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등산객이나 트레킹족의 손에는 스틱과 함께 '아메리카노' 종이컵도 들려있다. 커피 문화는 지리산 꼭대기까지 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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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르막이지만 짧고 완만했다. 길 자체만 보면 흔하게 걸을 수 있는 임도(林道) 보다 나을 게 없다. 그저 평범한 산길이다. 다만 성삼재를 기준으로 아래에는 없는 눈이 쌓여 겨울 왕국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기온이 다르기 때문이다.

편한 길을 택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50분 정도 오르니 노고단 대피소가 나타났다. 다시 노고단으로 약 20분 정도 가면 무넹기라는 곳이다.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에서는 구례읍과 섬진강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노고단 정상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의 너른 지대에는 여름철 노란 원추리꽃이 장관을 이룬다지만 지금은 솜이불처럼 소복이 쌓인 눈 길이 겨울 트레킹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발밑에서 뽀도독거리는 소리도 경쾌하게 들렸다.

높이 1507m의 노고단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인 지리산 종주의 출발점이다. 신라시대에 화랑의 심신 수련장이자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靈峰)이었다. 노고단이란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노고단으로 불린 것은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기 때문이며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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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 오르면 꼭 운해(雲海)를 봐야 한다고 하지만 일부러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온다.

'노고단 운해는 산자락을 단숨에 섬으로 만들며 신비에 가까운 자연 절경을 연출한다' 어느 산악인의 말 그대로다. 산자락 위에 일렬로 축조해놓은 구름의 성곽 같다. 그 빛깔도 기묘하다. 왼쪽은 푸른빛이 감도는데 오른쪽 구름바다는 붉은빛이 감돈다. 내일이 되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이른 봄을 연상할 만큼 따스한 겨울 노고단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갈구했다.

노고단에서 동쪽으로 임걸령~삼도봉~토끼봉~명선봉~형제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지리산 주 봉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45㎞에 걸친 장대한 주능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산행코스다. 보통 2박 3일 또는 3박 4일이 걸린다는데 노고단에 서면 이대로 천왕봉까지 내쳐 걸어보고 싶은 객기가 생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은 넉넉잡고 왕복 3시간의 가벼운 코스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광활한 능선의 설경과 '운해의 성(城)을 어디에서 감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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