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트레킹의 적(敵)은 태풍이다. 태풍이 몰고 온 폭우가 부드러운 계류를 급류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계곡은 스릴은 있지만 위험하다. 더구나 단체로 움직인다면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기도 한다.
지난 주말 강원도 홍천 수타사 산소길을 걸으려고 날짜를 잡아놨는데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했다는 예보가 나왔다. 주중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다고 간단히 취소할 수도 없었다. 오래전에 잡힌 일정이다.
그래서 기상청 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리며 살폈더니 다행히 홍천은 트레킹 당일 비가 오지 않았다. 수도권과 강원도를 강타했던 태풍이 공교롭게도 홍천은 비껴갔기 때문이다. 관광버스와 식당까지 예약하며 준비해 온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다만 전날 새벽까지 내렸던 장대비 때문에 코스는 급변경했다. 수타사에서 약 8km쯤 상류 쪽에 있는 노천 1교에서 계곡을 따라 걷는 ‘물길 트레킹’ 대신 산소길 풀코스를 걷기로 했다. 아쿠아슈즈를 신고 온 일행들은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온종일 흐린다는 기상청 예보와 달리 수타사 계곡엔 구름이 깨끗이 걷혔다. 청명한 하늘에 공기의 질도 다르니 역시 홍천은 청정지역이다. 기온도 섭씨 27도 안팎으로 더위가 한풀 꺾여 여름 트레킹엔 최적의 환경을 갖춘 날이다.
수타사 앞 연꽃연못을 거쳐 산소길로 접어들자 태풍이 할퀸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폭우를 못 이긴 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힌 채 간간이 길 위에 쓰러져있어 야생의 숲처럼 원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태풍 카눈이 몰고 온 폭우에 뿌리가 뽑힌 채 산소길로 넘어진 나무>
사람도 난관을 극복하며 성장하듯 나무도 태풍을 이겨내야 땅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 아람드리 나무가 울창한 건강한 숲으로 거듭난다. 아마도 병들고 허약한 나무는 이번 태풍에 견디지 못하고 수명을 끝냈을 것이다.
며칠째 내린 비 때문인지 산소길은 물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알싸한 숲향도 더욱 진했다. 마치 잔도처럼 벼랑에 매달린 좁은 산길아래엔 수위가 높아진 계류가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하듯 하류로 내달렸다.
그 와중에도 미끈한 암반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거대한 구유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궝소’에선 트레킹에 나선 40대의 뭇 사내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아이들처럼 물장난을 했다. 함께 온 여성들이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평소처럼 수심이 낮았으면 발만 담갔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산소길만으로는 성이 안 차 수타사로 돌아가는 삼거리에서 출렁다리를 건너는 대신 계곡을 따라 신봉마을까지 올라갔다. 산소길은 원점회귀해도 4km가 안돼 산책길 수준이다. 이 길의 반환점은 맞바위목교다.
목교옆 목 좋은 자리에 60대 부부가 운영하는 간이매점이 탐방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탐방객들은 누구나 평상이나 비치파라솔이 있는 의자에 앉아 자리값 대신 막걸리나 커피, 찐 옥수수를 사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주인장에게 “목교를 건너면 어디로 가게되느냐”고 물었더니 싱긋 웃으며 “집으로 가죠”라고 했다. 산소길의 들머리인 수타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목교를 건너 반대편 계곡길로 접어들었다. 계곡 반대편에 비해 거칠고 업다운이 심한 길이다. 도중에 잠시 그늘밑 바위에 앉아 탁족도 즐겼다. 물살은 셌으나 그리 차갑지는 않았다. 계곡 풍경은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유순했다.
산소길은 스펙터클한 풍광과는 거리가 멀다. 잔잔하고 소박한 길이다. 이날 1만 7565보를 걸었다. 예상보다 짧았지만 그 걸음만큼 청정한 산소를 들이마셨다. 당분간 잠이 잘 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