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원미상 Aug 10. 2023

여행 중입니다만,

부랴부랴 떠나온 외국이었지만, 호주는 아름다웠다.

아마 누가 쫓아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당장 떠나올 수는 없었을 거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나고 보면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나는 떠나왔고 인생 한편에 미뤄뒀던 계획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낯선 곳은 새로웠고 모든 건 다시 시작됐다. 나는 원점부터 천천히 제대로 걷기로 했다.  


시작은 역시나 휴식이었다.  뭘 할까 고민하는 척만 하며, 먹고 놀고 놀고 먹었다.

저축도 보험도 여기선 필요 없었다. 그저 먹고 놀 돈만 있으면 됐다.

잠시였지만 미래에 대한 투자 없이 현재만을 즐기며 살아보니 인생 참 쉽고도 낙낙했다.

오늘만 산다는 게 이렇게나 유쾌한 일이라니.

떠나올 때 들고 온 돈은 대략 3개월의 휴식비용. 알차게 써재꼈더니 역시나 3개월 만에 동이 났다.




아름다운 인생엔 돈이 조금 많이 들더랬다. 커다란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닷가를 누비며 한량처럼 살아봤다. 

여유롭고 찬란했던 3개월은 막을 내렸고

주머니는 비어있었다. 여행도 이만하면 됐고.. 아름다운 호주의 전경은 눈에 한껏 담았다.

돌아갈까.. 더 살아볼까.. 그래도 이왕 왔는데 비자가 만료되기 전까진 있어봐야 하지 않을까.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노심초사 근심걱정인 엄마는 마치 나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듯 눈시울을 붉히셨다.

친구들은 몇 번이나 나를 불러내 끝없는 환송회를 해주었는데..


이대로 돌아가긴 좀 머쓱타드 한 기분이었다.


사실 떠나기 전엔 할 수만 있다면 그냥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훌쩍 떠나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 내 마음을 엄마는 눈치채셨던 모양이다. 그냥 잠깐 여행 다녀오는거란 거짓말에도

마치 오랫동안 못 볼 것처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어차피 인간은 외롭다.

여기든 거기든 사는데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사계절이 한결같은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만큼 지내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를 두고 3개월 만에 짐을 다시 꾸릴까 생각한 건 의외로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본능적인 그 어떤 촌닭 같은 입맛 때문이었다.

아.. 이유가 좀 더 몽글몽글하고 감성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족이라던가. 친구라던가. 연인이라던가. 

그랬다면 못 이긴 척 다시 돌아갔을 텐데..


나는 몰랐었다. 내 입맛이 이렇게까지 일률적이고 획일화돼 있었다는 걸.

엄마 김치, 주꾸미볶음, 낙지볶음, 순대국밥, 깍두기 따위에 철저하게 지배당해 있었다.


하긴..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으니 알리가 없었다. 기본적인 욕구따위는 언제나 감성보다 얕다고 믿었었는데

 언제나 감성이 먼저였을 수 있었던 건

기본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이었나 보다.


김치 때문에 돌아왔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해.

결국 수없는 발품을 팔아 전라도 김치 맛을 내는 김장김치를 사들 인후 나는 호주에 눌러앉을 결심을 내렸다.


아마 엄마는 한번 떠난 내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거다. 본인 딸이니까.

여권 한번 만들어보지 않은 딸이 덜컥 외국으로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도 딸 낳고 살아보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내 딸을 그 먼 타국땅에 아는 이 하나 없이 보낼 수 있을까.

학교를 다니는 것도,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말이다.


온실 속 화초까지는 아니지만 비바람 한번 맞지 않고 살았다. 엄마는 힘닿는 데까지 우리를 보호하셨지만

 낯선 나의 선택 앞에서도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주셨다.  


어쩌면 허락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엄마에게서 완전히 독립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벌리거나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내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으셨을 거다.

대학도. 말 같지도 않은 유학도. 직업도. 결혼도.

엄마는 늘 말없이 응원하셨다.


나랑 똑 닮은 딸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엄마는 어떻게 그러셨을까. 새삼 대단하고 경탄스럽다.




김치도 구했고 돈도 떨어졌고 일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돈이 목적인 친구들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농장으로 향했고

영어가 되는 친구들은 식당 서빙이나 알바를 구했다.

외국에 와보고 알았다. 한국을 떠나면 우리 또한 외국인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힘이라도 세 보여야 청소라도 시켜준다는 걸

떠나오기 전 성실히 쌓아뒀던 내 영어 실력은 그저 음식을 시킬 때를 제외하곤 쓸모가 없다는 걸.

길거리를 전전하는 거지들조차 동양인을 무시했다.

K-문화가 퍼지기 전이었고, 호주가 유독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인이라면 일본 또는 중국인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사람이라는 말 앞에 꼭

south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일자리를 찾다 보니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네일숍이 보였다. 이제 막 오픈한 것 같았다.

맞다. 나 네일리스트였지.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는 없었지만 저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급히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출력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직 사람을 구하고 있지 않지만 원한다면 출근해도 좋다고 하셨다.

샵은 오픈을 앞두고 있었고, 한 달 정도 오픈을 위한 준비를 같이 해준다면 고맙겠다고 하셨다.

샵 오픈 준비경험이 있다고 말한 것이 플러스였다.

마지못해 했던 일이 도움이 됐다.

3층짜리 건물은 헤어와 네일 그 외 뷰티와 스튜디오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오너는 두 분이었고 하나같이 물음과 대답이 정확했다.

뒤끝이 깔끔한 게 오히려 좀.. 이상했다.  

뭐지, 끈적끈적한 느낌없는 이 산뜻함은.


호주는 노동자에 대한 원칙이 훨씬 확고했다.  물론 우리나라도 지금은 그렇지만 그때 당시엔

호주가 훨씬 앞서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사람 차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일하는 6시간만 채우면 됐다. 그 시간에 오는 손님을 받고, 시간이 끝나면 손님을 하다가도

뒷 타임 직원에게 넘기고 퇴근하면 그만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퇴근하지 않는 나를 보며

오너는 의아해했다. 나중에 보니 시급으로 계산되는 일터에서 퇴근을 하지 않는 건 오히려 실례였다.

웁쓰.


심지어 퇴근 5분 전 미리 옷을 갈아입고 정각에 문을 나서는 직원을 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출근도 5분 빨리 하니 퇴근도 5분 빨리 한다는 나이스한 아무 말을 내뱉으며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나갔다

퇴근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한다. 퇴근한다는 허락 따윈 필요치 않았다. 

요즘 MZ 가 호주에선 무려 15년 전부터 존재했다.


1년을 일했지만 나는 시간을 채워주는 시급 아르바이트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가벼움이 너무 좋았다.

여긴 외국이고 나는 여행 중일뿐이니 잠깐은 이런 시간도 괜찮겠지.


같이 일하는 친구들은 국적도 인종도 성격도 다양했다.

그 중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딘'이라는 남자는 지금으로 치면 인스타 셀럽이었나 보다.

경력이 초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팬이 많았다.

(잘생겼다)

다른 곳으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은 딘은 그 사실을 오너 두 분에게 설명하며 거기가 돈을 더 많이 주니

 떠나야겠다고 상세히 말했다.

'컬처쇼크'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화이트 한 거짓말, 핑계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오너는 흔쾌히 딘을 떠나보냈고 굿바이 선물도 잊지 않았다.


딘은 떠나며 내 볼에 키스를 해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볼뽀뽀는 호주식 인사가 아니었다.

이노무시끼가.


나만 빼고 모두가 나이스한 굿바이를 할 줄 알았다.




쿨하고 심플한 사람들과의  시간은 금세 흘렀다.


이곳이 좋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하나였다.


비자를 연장하고 시간을 더 보냈지만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을 없앨 수는 없었다.

영주권이 비교적 수월하게 나오던 예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민자들의 나라. 여러 국적이 공존하던 호주도 이민자들에 대한 문을 닫고 있었다.

더 이상 이민자들에게 영주권을 주지 않겠다는 공표로 인해 많은 이민자들이 발을 돌렸다.

그 당시 홈스테이로 머물던 집은 다섯 가족이 모두 이민을 온 상태였지만

모두 영주권을 취득하는데 실패했다.

간호사였던 엄마는 영주권을 얻는데 용이한 직업이었고 재력가였던 할아버지의 뒷배도 든든했지만

영주권의 벽은 높았다.


한때 정육점 고기만 줄기차게 썰어도 영주권이 나왔다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나는 여행을 끝내야 했고 돌아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작가의 이전글 캐치 미 이프 유 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