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꾸렸다.
눈물 나게 아름답던 풍경도 내 것 인양 걷던 이 공원도 다시 볼 수 없게 되겠지만, 이방인으로 누렸던
자유는 스무 살 중반에 끝내야 했다.
뭐 하나 딱히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어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을 지나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지상에서 발을 반쯤 떼고 살았던 이 몽환적인 한때를
접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 엄마의 딸이다.
나는 자유로워.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제 아무리 MZ스러운 척을 해보아도
내면에 자리 잡은 나는 사실 그런 모양새는 아니었다.
돌아갈 때가 됐으니 돌아보지 말고 돌아가자.
다시금 핸드폰 요금과 보험, 쇼핑 따위로 채워진 카드값을 메꾸고자 하루 10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미래를 위한 월 10만 원짜리 적금을 붓는 그런 정기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거다.
지금도 여행중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파노라마처럼 좋았던 기억들이 스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기억될 이 여행을 마치고
짐을 꾸려
짐을 꾸려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히히히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홍콩야경이 그렇게나 좋다던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직항보다 경유가 싸다는 이유도 있었고 이렇게나마
한 군데라도 더 들러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나보다 큰 캐리어를 끌고 홍콩여행에 나섰다.
돈이 없어 싸게 산 티켓은 그 캄캄한 새벽에 나를 홍콩공항에 내려다 놨다.
1년 살이 그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곳에 내려졌을 때 생각이 났다.
그냥 이거 끌고 한국에나 가지. 가지가지한다.
그때의 나는 뭘 할 줄 안다고 알지도 못하는 곳에 척척 잘도 간다고 했을까. 그것도 혼자서.
운전도 지도 보고 하던 시절이다. 스마트폰도 번역기도 없던 시절
영어 좀 하면 세계 어딜 가도 의사소통은 되겠지. 하고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 누구도 영어를 할 줄 몰라 숙소를 찾지 못하였다.
(영어가 어딘가에선 제2외국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영어가 어딘가에선 제2외국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겁도 없지. 그 캄캄한 새벽에 여자애혼자 그 큰 짐을 들고 홍콩 작은 골목길을 돌며
묻고 또 묻고 돌고 또 돌았다.
역시나 돈이 없어 한국 분이 운영한다는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 놓고 그 작은 집을 끝내 찾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아침을 맞았다.
분명 이 근처라고 했는데 ㅠㅠ 근처까진 잘 왔는데..
(어마 무시한 길치에 방향치다... )
개고생. 번번이 하게 되는 모자란 행동에도 나는 나를 아유 하지 않았다. 뭐. 설마 오늘 안에 못 찾겠나.
나에게 쉽게 실망하지 않던 나. 관대하기도 하지.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움켜잡으며 들른 맥도널드에서 한국분을 만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출장 차 홍콩에 들른 분이셨고 다행히 근처 지리에 훤해 주소만으로도 숙소를 찾아주셨다.
그 곳을 지나가고 또 지나갔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던 나를.. 나는 아유 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아는 게 없어 의심도 적고 정말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타지에서 만나 알지도 못하는 분과
맥도날드에서 아침도 먹고 이메일 주소도 교환해 다음날 저녁엔 같이 야경도 보러 갔다.
어차피 길도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잘됐다고 생각했다. 가이드 마냥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분도 무료했던 출장지에서 만난 인연이 그저 재밌으셨나보다.
내 딸이 모르는 사람이랑 홍콩 야경거리를 거닌다고 생각하면 머리끄덩이를 잡아다 집에 가둬놓아야지
지금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한 일들을 잘도 하고 다녔다.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사 이쯤 살다 보니 이제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태세부터 갖추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래도 확실히 세상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저 머무는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던 ,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던, 아무거리나 걷고 아무곳이나 갔던 내 인생 마지막 무계획 여행도 끝이 났다. 출장 중이었던 그분에게
이메일이 한 번 더 왔지만 계속 연락할 이유는 없어 고민은 했으나 답장은 하지 않았다. (차가운 편)
어차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거고 그곳에선 이런 낯선 인연은 필요 없으니까..
나는 다시 짐을 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