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89. 지배주주 중심 한국 증시에서 소액주주를 보호하라
공익허브는 매주 월요일 ‘미션 100’을 연재합니다. 한국사회에 필요한 제도적 변화 100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비트코인 시총보다 못한 국장” “국장 탈출은 지능순” “국장은 답이 없다, 미장이 답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는 ‘격언’입니다. 언뜻 국내 증시를 쉬이 폄 하하는 말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주식시장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1400만 개인투자자들의 체념 섞인 한탄을 금세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긴말 할 필요 없이 국내 증시 성적표를 보시죠.
주요국 증시가 연초 대비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하는 동안 우리나라 코스피는 뒷걸음질 치며 폭락했습니다. 같은 기간 개인투자자들의 순매수 상위 100종목 평균 수익률은 -31%에 달했어요. 전세계 증시가 일제히 아래로 향했다면 조금은 덜 억울하겠지만, 유독 한국 주식시장만 부진의 늪에 빠져 있으니 ‘국장 엑소더스(exodus•대탈출)’이 일어나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올 5월부터 국내 증시 부양을 위한 ‘코리아 밸류업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이 시행되고 있지만,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상장기업의 자산 대비 주가의 가치를 나타내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을 살펴보면 10월 기준 여전히 1배 미만에 머물고 있습니다. PBR 수치가 1배 미만이면 기 업의 보유 자산보다 주가가 싸다는 의미예요. 그만큼 주식 가치가 저평가 받고 있다는 얘기죠.
이런 상황에서 최근 개인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바로 상법 개정입니다. 상법 개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반 개인투자자•소액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서 주주가치를 제고하고, 이를 통해 한국 증시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22대 국회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상법 개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이사 충실 의무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현행법은 이사의 충실 의무에 대해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이를 ‘회사와 주주를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바꿔 일반 투자자와 소액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것이 상법 개정의 최우선 목표입니다.
일반 주주들이 이사 충실 의무의 대상에 포함되면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기업의 행위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됩니다. 지배주주가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기업을 분할해 쪼개기 상장을 하거나 부당한 M&A를 하고, 사익 편취 수단으로써 유상증자를 하는 등 ‘일반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함부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러한 상법 개정 내용에 경영계는 반발하고 있습니다. “회사이익이 곧 주주이익”이기 때문에 명 문상 회사와 주주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지배주주 중심의 국내 기업 구조를 고 려하면 회사의 이익이 주주의 이익이란 경영계의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미 회사이익은 일반 주주이익과 다르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습니다. 상법 개정 논의의 시초가 된 삼성에버랜드 사태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과거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전환사채(CB•향후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를 헐값에 발행한 뒤 자녀들이 인수하게 했습니다. 기존 주주인 삼성 계열사 들에게는 인수권을 포기하도록 했고요. 이재용 회장 등 자녀들은 수월하게 지분을 확보하며 에버 랜드의 최대주주 자리에 올라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주주인 삼성 계열사들은 본래 가격보다 훨씬 못한 값에 자산(주식)이 팔린 셈이니 손해를 입을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럼에도 대법원은 이 전 회장 등 삼성 경영진에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전환사채 헐값 발행이 주주인 삼성 계열사의 이익을 침해한 건 맞지만, 회사(에버랜드)의 이익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였어요. 상법상 이사는 회사를 위해 충실한 직무 수행을 할 뿐, ‘주주’를 위한다는 내용은 없으니 처벌의 근거가 없었던 것이고요.
에버랜드 사태를 살펴보신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경영계의 주장대로 회사의 이익이 곧 모든 주주의 이익이라고 보시나요? 회사의 이익이 일반 주주의 이익과 같다면, 우리나라 상장기 업들은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을 주주들과 나누는 ‘배당’에 적극적이었을 겁니다. 현실은 어떨까 요?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상장사들의 배당성향은 20.1%로 주요국 배당성향(▲미국 40.5% ▲영국 45.7% ▲독일 40.8% ▲프랑스 39.3% ▲일본 36.5%)보다 현저히 낮습니다. “회사이익과 주주이익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경영계는 지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거죠.
경영계가 펼치는 반론은 또 있습니다. 만약 개정 상법을 시행한다면 이사회의 정당한 의사결정이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결정’으로 왜곡돼 부당하게 책임을 추궁 당하고, 소송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신주발행이나 전환사채 발행도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을 가져온다”고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의 원활한 자금조달도 어려워진다고 주장하고요. 국내에서 세력을 확장 중인 글로벌 행동주의펀드가 개정 상법을 악용해 경영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도 표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경영계의 기우일 뿐이라고 진단합니다. 이사의 충실 의무는 지배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충돌 사안에 적용하는 것이라, 사익 추구만 없다면 부당한 소송을 당할 일이 없다는 거죠. 일반 주주가 ‘투자 실패로 인한 주가 하락’을 빌미로 소송을 남발할 것이란 주장도 어 불성설이란 분석입니다.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인정하는 미국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사안에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적용해서 판결을 한다는 거예요. 이사들이 주의 의무를 다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영계는 상법 개정 자체가 필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일반 소액주주 보호 를 위한 각종 조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랍니다. 주주대표소송, 주식매수청구권 등을 그 예로 들었죠.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러한 법적 제도와 장치들이 과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냐는 겁니다.
1997~2017년까지 20년간 주주대표소송 판결을 분석한 결과, 원고인 주주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 들인 ‘전부인용’ 사건은 8건, 부분만 인정한 ‘일부 인용’ 사건은 36건이었습니다. 반면 소송에 필요 한 형식적 요건이 부족하다고 본 ‘전부각하’ 사례는 40건, 소송의 이유가 없다고 보고 종결을 판단한 ‘전부 기각’은 53건이었습니다. 국내 실정상 법원에 일반 주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여의치 않다는 방증입니다.
기업 합병 시 그러한 의사결정에 반하는 주주가 “보유 주식을 매수해달라”며 행사할 수 있는 주식매수청구권도 보호 장치로써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나라 상장회사 합병 사례의 67%가 소규모 합병에 해당하는데, 소규모 합병의 경우 주주들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주식매수청구권의 매수 가격을 산정할 때도 자본시장법상 당사자 협의가 원칙 이나, 실제로는 시행령 산식에 따라 산정된 가액을 회사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는 가격 산정에 반영되지 않는 구조인 것이죠.
이처럼 기존에 존재하는 법제를 통해선 일반 주주의 권리 실현을 충분히 이뤄낼 수 없습니다. 경영계의 주장과 달리 불완전한 제도를 보완할 또다른 장치가 필요한 상황이죠. 그동안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이상훈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수록 대규모 주식회사의 시장지배력이 높아지고, 국민의 의존도가 커지면서 주식회사의 사회적 영향력도 증대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주식회사의 역할을 어떻게 자리매김 시킬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2006년 영국에서는 주식회사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어디까지 법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지 많은 논의가 오갔습니다. 그 결과, 주식회사가 자본의 결합체인 이상 이사는 일부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아닌 주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됐죠. 나아가 단기적 수익이 아닌 장기적 성과를 주식회사의 지향점으로 설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사의 행동은 종업원, 공급자, 고객, 높은 수준의 사업윤리, 지역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는 ‘진보된 주주가치’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고요.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국장 당했다(국내 주식에 투자했다가 크게 손실을 입었다)’는 밈은 더이상 우스갯소리로만 통용되지 않습니다. 눈물과 후회의 ‘매도’ 버튼을 누르면서도 상법 개정을 외치는 개미들의 마지막 호소,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대상은 누구도 아닌 기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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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중앙일보. 24-11-12. ["일년 내내 소송하란 얘기"… 재계 경악시킨 상법개정안].
소비자경제. 24-10-21. [ 이사진 ‘소액주주 보호’ 조항 놓고 찬반 양론 첨예].
경향신문. 24-09-15. [‘뜨거운 감자’ 상법 개정 이슈… 추석 후 불붙는다].
한겨레. 24-07-13. [‘상법개정 반대론’ 억지·왜곡 투성이… 일반주주 피해 나몰라라].
뉴스핌. 24-06-20. ["이사회 마비·배임죄 등 법적 리스크 증폭"].
한국경제인협회. 2024. [상법개정(이사 충실의무 확대)에 관한 경제단체 공동건의].
경제개혁연대. 2023.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 토론회].
자본시장연구원. 2023. [현행 주식매수청구권제도의 한계와 주주 보호를 위한 개선과제].
경제개혁리포트. 2018. [주주대표소송 현황과 판결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