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91. 더 이상의 사기 범죄 양산을 막아라
공익허브는 매주 월요일 ‘미션 100’을 연재합니다. 한국사회에 필요한 제도적 변화 100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생애 처음 받아보는 은행대출금, 쥐꼬리만 한 급여에서 떼어낸 월급의 일부, 배달음식 꾹 참아가며 차곡차곡 쌓았던 목돈. 긴장과 설렘, 인내와 희망이 얽히고 설킨 ‘내 집’. 대부분 사회초년생이었던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집은 이런 의미였습니다.
다음을 향한 도약의 꿈이 무르익기도 전에 황망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던 피해자들. 얼마 전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원룸 9채, 총 296세대를 갭투자 방식으로 사들여 229명의 임차인에게 180억여원에 달하는 피해를 입힌 사기범에게 징역 15년형의 처벌이 내려진 겁니다. 법원은 검찰의 구형(징역 13년)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죄에 가할수 있는 법정 최고형이었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 개개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피해자들의 탄원서를 장문에 걸쳐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의 눈물을 대변하고 상처를 어루만진 판결 내용은 과연 어땠을까요? 일부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사기죄의 피해는 재물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맞아 생긴 상처가 아무는 데는 2주나 3주, 기껏해야 몇 개월이지만, 사기 피해가 회복되는 데는 수년에서 최악의 경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사기는 피해자의 재산을 가져감과 동시에,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시간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나쁜 범죄다.
또한 사기는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를 외부에 드러내어 타인으로부터 고통을 이해받거나 위로받는 것마저 어렵게 만든다. 같은 상황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존재 때문이다. 사기 피해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계속 탓하게 되고,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빠져 고통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다 일상생활마저 평소처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피해자가 무너짐에 따라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 역시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결국 사기는 피해자의 자장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모든 사기 피해자들의 처지에 무슨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사건이 안타까운 점은, 피해자들 대부분이 20대와 30대의 사회초년생들이라는 점이다. 피고인이 편취한 전세보증금 중에는, 그 누구보다 근면하고 착한 젊은이들이, 생애 처음 받아 보는 거액의 은행대출금과, 주택청약부금과, 적금과, 쥐꼬리만 한 급여에서 떼어 낸 월급의 일부와, 커피 값과 외식비 같이 자잘한 욕망을 꾹꾹 참으며 한 푼 두 푼 모은 비상금과, 그들의 부모가 없는 살림에도 자식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며 흔쾌히 보태준 쌈짓돈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이들에게 이 돈은 그저 장사 밑천이거나 금리 몇 퍼센트의 수익을 올리는 종잣돈이 아니라, 자신들이 설계한 빛나는 인생의 목표 지점으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여비와 같은 돈이다. 피해자들은 이 돈을 잃음으로써, 희망찬 인생의 출발선에서 뛰쳐나가 보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 주저앉아 울고 있다.
부산 사건의 판결은 전국을 뒤흔든 집단 전세사기 사건 중 처음 나온 대법원 판결입니다. 각 지역의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지침서처럼 여겨질 수 있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부산 전세사기 사건처럼, 사기 피해자의 고통까지도 헤아리는 판결은 예외적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다”.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사기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2018년 27만건이었던 사기범죄 건수는 2022년 32만6000건으로 5년 새 20.7% 증가했습니다. 2018~2022년까지 5년간 사기범죄로 검거된 인원만 149만3000명에 달합니다. 한해 평균 약 30만명의 ‘사기꾼’이 잡혔다는 뜻이죠. 이렇게 쉴 새 없이 사기 범죄가 벌어지는 동안 누적된 피해 규모는 자그마치 126조4000억원. 1년에 25조원가량의 사기범죄 피해액이 발생하는 셈인데, 이는 어지간한 지자체의 한 해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도시를 한 곳을 운영하고도 남는 비용이 사기꾼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10월 기준 사기 사건으로 검거한 피의자 1인당 평균 범죄수익은 1억59만원입니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자 2054만명의 1인당 평균 연봉(4214만원)보다 2.4배 더 많습니다. 타인을 속이고 꾀어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보통 사람들이 정당한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보다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있으니 더욱 괘씸합니다. 범죄수익은 환수해서 피해자에게 되돌려주고,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벌에 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2020년 발표한 ‘전국범죄피해조사’ 보고서를 보면, 전체 사기 범죄 사건 중 피해액을 전부 회수한 사례는 13.9%에 그쳤습니다. 일부를 되찾은 경우도 12.7%에 불과했고요. 나머지 73.4%는 피해액을 전혀 회수하지 못한 케이스에 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처벌은 어떨까요?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표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전문가들은 사기 사건의 발생 빈도와 편취액 규모에 비해 처벌 수위가 매우 약하다고 지적합니다. 특경법(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상 가중처벌 규정도 따로 있지만, 이를 입증하기 쉽지 않아 실제 가중처벌에 이르는 경우도 많지 않다고 해요. 사기 사건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죠.
"사기를 치면 무조건 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사기를 친 돈을 차명으로 다 돌려놓거든요. 너무 형량이 약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앞으로 명의로만 된 재산이 없으면 뺏길 염려도 없고, 그래서 교도소에 있으면서 오히려 행복해한답니다."
만약 10억원 규모의 사기 범죄를 일으켜도 징역은 4~5년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사기범들 사이에서도 “차라리 징역을 살고 나오는 게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사실상 월급만 몇 천만원에 이르는 ‘황제 징역’인 거죠. 그래서인지 사기 범죄는 재범률이 높아요. 2022년 기준 사기 범죄의 재범률은 42.4%로 전체 범죄 평균치(29.3%)를 훨씬 웃돌았죠.
솜방망이 처벌이 더 많은 범죄를 양산하고, 급기야 사기 수법까지 다양해지자 양형위원회는 13년 만에 사기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높이기로 결정했어요. 특경법의 적용 대상인 5억원 이상 사기 범죄의 형량을 대폭 늘리고, 조직 범죄의 경우 권고 형량 범위에 무기징역을 포함하기로 했죠.
법조계에서도 사기죄 양형 기준을 현실화하는 방향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다중사기범행의 근절을 위해 피해자가 많은 경우 양형의 가중요소로 고려하거나, 범죄 건수에 따라 형량을 합산하는 미국식 형법의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죠. 재범을 막기 위해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상습 사기범은 신장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요.
양형 기준을 높인다고 해도 제도적 보완이 더 필요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더 엄격한 잣대가 생기는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일 겁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지, 예의주시하며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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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시사저널. 24–11-23. [94억 횡령, 8억 사기 쳐도 '집유'… 경제범 형량, 이대로 괜찮을까].
한겨레. 24–11-21. [부산 ‘180억 전세사기’ 징역 15년… 사기 범죄 법정 최고형].
오마이뉴스. 24–11-20. [[전문] 피해자들이 눈물 흘린 '전세사기 법정 최고형' 판결문].
농민신문. 24–11-13. [피해자는 목숨도 끊는데… 5년간 사기피해 ‘126조원’, 처벌은 ‘솜방망이’].
중앙일보. 24–08-13. [50억 이상 조직적 사기, 무기징역까지 권고… 사기범죄 형량 올린다].
한국경제. 24–04-28. [[단독] 대법원, 13년 만에 '솜방망이' 사기 양형기준 손본다].
이데일리. 23-12-01. [범죄자 5명 중 1명은 사기꾼… 수법 진화에 속수무책 [사기공화국]].
국민일보. 23–11-21. [“몇 년 들어갔다 오지 뭐”… 사기꾼, 평균 범죄수익 1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