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조차 차별받는 사람들

by 공익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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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제16대 총선. 경기도 광주에 사는 서승연 씨는 휠체어를 타고 가족과 함께 투표소에 방문했다. 그녀는 곁에는 7살 난 아들도 함께였다. 서승연 씨는 아들에게 장애인인 엄마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투표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2층인 투표소로 올라갈 수 있는 휠체어를 위한 이동편의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에 있던 선관위 직원은


“다음에 투표해라. 당신만을 위해서 들판에 투표장을 둘 수는 없지 않느냐.”


라고 말했다. 서 씨와 그의 남편, 남동생은 선관위의 무성의한 태도를 비판하며 제16대 총선 투표를 기권했다. 세 사람은 문학진 후보에게 표를 행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해, 문학진 후보는 단 3표 차이로 낙선했다.


스윙 보트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스코에 사는 한량 버드 존슨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고, 투표에 관심 없는 한량 버드 존슨 대신 그의 똑똑한 딸 몰리 존슨이 아버지 몰래 버드의 표를 행사하려 한다. 그런데 청소원의 실수로 전자 투표의 코드가 뽑히며 버드 존슨의 표는 시스템 오류처리가 된다.

개표 결과 공화당과 민주당의 득표율이 한 표의 오차도 없는 동률이 되고, 시스템 오류로 재투표 권한을 가지게 된 버드 존슨의 한 표가 미국 대통령의 자리를 결정짓게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투표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이자 국민의 가장 큰 권리이다. 한 사람의 투표권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왔다.


그런데 그 권리가 장애인들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을까?


선거철이 되면 우편함에 꽂히는 서류뭉치가 있다. 바로 후보자들의 공약 소개 팸플릿이다.

비장애인들에겐 너무나 손쉽게 접할 수 있어 대충 한 번 읽어보고 마는 흔한 종이지만, 장애인들에겐 이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점자 선거 공보문이 현행 공직선거법상 ‘책자형 공보 면수의 2배 이내에서 제작’하도록 규정되어 있어서다.


일반적인 책을 점자책으로 바꾸면 분량이 3배가량 늘어난다. 그런데 2배 이내로 제한을 둔다는 것은 장애인들에게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다 알려주지 말라는 것과 같다.

실제로 2020년 보궐선거 당시 점자형 공보물에는 후보자들의 공약이 30%가량 누락됐다. 이것은 명백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다.


장애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최혜영 의원을 대표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먼저 개정안은 점자형 선거공보의 면수 제한을 없애고, 후보자가 책자형 공보와 동일한 내용으로 점자형 공보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또한 책자형 선거공보에 인쇄물의 정보를 음성이나 점자로 변환시켜주는 ‘인쇄물 접근성 바코드’를 필수적으로 넣게 했다.


둘째로 후보자 초청 토론회와 같은 선거 관련 행사에서 수어와 자막 제공을 의무화했다.

현재 공직선거법에는 선거 관련 행사를 열 때 수어 통역 또는 자막을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긴 하나 의무규정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2014년에 있었던 제6회 지방선거 당시 선거 방송에서 자막을 제공하지 않은 도시는 16개 도시 중 84.3%나 되었고,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은 곳도 25%나 달했다.


개정안은 선거운동을 위한 방송광고, 후보자 연설 방송, 공개장소에서의 연설·대담, 단체의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수어와 자막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개최하는 대담이나 토론회를 방송할 때에도 수어 통역과 자막 두 가지 모두를 방영하도록 했다.


토론회는 투표할 후보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정보 습득 과정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글 초반에 이야기했던 서승연 씨의 가족은 2층에 위치한 투표소로 인해 투표 접근성에 제약을 받았다. 만약 장애인이 신체적 제약과 접근성에 제한을 받지 않고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면, 문학진 후보에게 ‘문세표’라는 별명이 붙을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리한 곳’에 투표소를 설치하라고만 되어있는 조항을 개정안은 ‘노약자,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선거인’의 통행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1층 또는 승강기나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이 있는 곳에 투표소를 설치하도록 했고, 사전투표소를 설치할 때도 같은 규정을 적용한다.


신체장애인 외에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조항도 추가됐다.

지난해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선거관리위원회는 돌연 선거 지침에 규정된 투표 보조 지원 대상에서 발달장애인을 제외해버렸다.

이 때문에 신체적 장애가 없단 이유만으로 활동 지원사나 근로보조인이 없으면 사회생활하기 힘든 사람들조차 혼자서 투표를 진행해야 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발달장애 등의 정신적 장애 혹은 노령으로 인해 혼자서 기표하는 것이 곤란한 선거인은 가족이나 본인이 지명한 2인, 또는 공적 보조원의 도움을 받아 투표할 수 있게 된다.


그 외에도 영국과 터키처럼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사진과 소속 정당을 상징하는 마크, 심벌을 표시하도록 하여 후보를 더 용이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몇 년 전에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캔음료 위에 쓰여 있는 점자는 전부 ‘음료’라고 되어 있다고.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은 코카콜라와 포카리스웨트를 점자로 구분해서 구매하지 못한다고.


이 글을 읽었을 때 이것은 명백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 생각했다. 장애인은 아무 음료나 마셔도 된다는 뜻인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캔음료 하나 사지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현재도 캔음료 위의 점자는 ‘음료’라고만 적혀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점자인지 알 수가 없다. 제작자의 자기만족인 걸까.


그런데 이러한 차별이 선거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모두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정보의 격차를 가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라고 하였고,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27조는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 및 설비, 참정권 행사에 관한 홍보 및 정보 전달, 장애의 유형 및 정도에 적합한 기표방법 등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장애인은 단지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그 다름은 차별이 아니라, 인정과 존중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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