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부터 미국의 배심제까지
1. 신화 이야기
어느 날, 전쟁의 신 아레스는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그가 아는 목소리였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목소리의 위치로 가 본 그는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딸 알키페가 누군가에게 강간당할 위험에 처해있었거든요. 극도로 분노한 그는 강간미수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남자는 바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거든요.
분노한 포세이돈은 아레스를 살인죄로 고발하게 되고 이에 올림포스의 주요 신 열두 명이 모여서 재판을 열게 됩니다. 오랜 논의의 끝에 열 두 신들은 아레스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레스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되죠. 이 재판이 이루어진 장소는 아레스의 이름을 따 ‘아레스의 바위’라는 뜻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Areios Pagos) 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아레이오스 파고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현재 그리스 대법원의 이름이 되었다고 하네요.
신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 언덕은 배심원 재판이 처음 열린 장소로써 실제 아테네의 역사에서도 이 언덕에서 역사의 첫 배심재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배심제의 시초를 찾는 것이죠. 절대적인 존재인 신 조차도 (그것이 동등한 신들에 의해 행해진 것이긴 했지만) 재판의 결과에 운명이 좌우된다는 사실은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재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요?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배심 재판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독재자나 특권층이 아닌, 시민의 관점에서 시민의 기준으로 직접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소수의 권력자가 아닌 다수의 시민에게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곳이 바로 이 아레이오스 파고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언제 시작된 거지?
이렇듯, 소수의 집단에 의해 모든 결정이 좌우되는 것을 방지하는 배심제는 법관들이 독점하던 사법권력을 시민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수행하며 현대까지도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형사재판의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국민참여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오늘은 이 제도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그 역사에 대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배심제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통일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 배심제의 기원을 찾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이것은 배심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무엇을 배심제의 특징으로 규정하냐에 따라 모두 성립 가능한 주장들이죠. 다양한 결의 다양한 제도들 사이에서 배심제의 정확한 기원을 밝히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한 논문에서는 배심제의 기원에 대해 이 시스템은 정확한 기원이 없는 ‘병행적인 경험의 산물’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희는 배심제가 존재했다고 알려진 가장 과거의 사회,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해볼까 합니다.
3. 그리스 - 신화와 현실: 아레스와 소크라테스
앞에서 말씀드린 신화 속 사건이 그리스인들에게 재판에 의한 결정이 갖는 중요성을 나타낸다는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매년 6000명의 배심원 후보를 뽑아 사건이 하찮을 경우에는 201명, 보통일 경우에는 501명, 아주 중요한 사건일 경우에는 1501명의 배심원을 배정해 판단을 내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신들 또한 동등한 위치의 열두 명이 모여서 재판을 내리니 일반 시민들 또한 동일한 방식의 재판을 취한 것이죠.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정체제를 유지해온 것을 생각하면 아테네인들의 민주적인 배심제도가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가장 유명한 배심 재판은 아이러니하게도 배심제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고 종종 여겨지는 재판입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죠. 당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지도자들 및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적인 언행으로 권력자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에 그는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되죠. 그리고 이곳에서 501명의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지금의 기준에서는 이것이 잘못된 판결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을 적용하였을 경우의 이야기일 뿐, 그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그것이 정의로운 결정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판결의 내용이 아니라 이 제도가 소수의 독재자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는, 현대의 민주주의에 근접한 매우 진보적인 제도였다는 사실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도 이 사실을 인정했기에 묵묵히 배심원단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4. 신의 선택에서 인간의 판단으로 - 영국의 첫 시작
13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신성 재판이라는 형태의 야만적인 방식의 재판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신성 재판인데 야만적이라니, 역설적이지요? 하지만 이 재판은 야만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성 재판에서는 범죄 혐의를 받은 사람에게 다양한 형태의 물리적 고통을 가한 뒤에 이 사람이 살아남거나 정해진 시간 내에 회복한다면 그 사람이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신체적 고통의 유형은 사람을 물에 빠트리는 것이나 뜨거운 불판 위를 걷게 하는 것, 고의로 상처를 입히는 것 등 다양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고소된 이가 무고한 사람이라면 신이 보호해 줄 것이고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신이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원시적인 신앙에 근거한 판단기준이었죠. 천년도 더 전에 아테네에서 사용되던 배심재판에 비하면 심각하게 퇴보한 재판 방식이네요. 일단 법정에 서게 되면 누구든 죽음의 위험에 맞서게 되니 아마도 권력자들이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했겠지요? 때문에 이 시기에 영국에서 현대의 배심제와 유사한, 고대 그리스의 방식보다 조금 더 체계적인 배심제가 탄생하게 됩니다.
영국 배심제도의 시초는 헨리 2세의 통치시기 (1154-1189) 입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토지 소유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는 문제 해결 방식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헨리 2세는 이 판단 방식을 체계화하여 12명의 배심원들이 자신의 가진 정보를 활용하여 사안을 판단하게 하는 방식으로 배심제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지금의 배심원들이 사실에 근거한 가치판단을 주로 한다면 이 시기의 배심원들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이 더 강했던 것 같네요. 그러던 중, 1215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신성 재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에서는 분쟁 해결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재판 시스템으로 배심원 제도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죠.
영국의 배심제도가 명시된 부분은 1215년에 제정된 영국 대헌장 (마그나카르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그나카르타 39조에서는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의 몰수 등의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죠. 동등한 시민들에 의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확실히 정해준 것입니다. 여기서 명시된 자유민에는 성직자, 귀족, 자유 시민 등 농노들을 제외한 소수의 인원들만이 포함되긴 했지만요.
하지만 이 당시의 배심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보다는 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존재했던 권력다툼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 근본 자체도 왕가에서 귀족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관점이 있거든요. 당시의 배심원단은 실질적으로 국왕의 예속 기구였기 때문에 왕의 뜻을 거스르는 판단을 내린 배심원단이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5. 부쉘 사건: 배심제도, 자유의 수호신이 되다.
1670년, 두 명의 퀘이커 교도들이 법정에 서게 됩니다. 이들의 이름은 윌리엄 펜과 윌리엄 미드로, 집회 선동의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죠. 이 사건을 맡은 배심원들은 두 사람이 거리에서 벌인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이 존재하지 않기에 무죄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당시 런던시장 겸 재판장이었던 스탈링은 이들에게 자신의 지시에 맞는 평결을 내리도록 지속적으로 명령하죠. 이들은 3일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이 명령을 거절합니다.
결국 법원은 이들 전원의 석방을 명령합니다. 배심원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할 절대적인 권리가 있고, 판사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처벌될 수 없다는 이 판결을 계기로 배심자의 지위가 명확하게 확보된 것입니다. 이 배심원단을 이끌었던 사람의 이름이 에드워드 부쉘이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배심제도에는 “자유의 수호신” 이라는 명예로운 명칭이 부여되곤 했습니다.
앞에서 영국의 배심제도는 권력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드렸었죠? 윌리엄 펜과 윌리엄 미드에 대한 재판에서 용감하게 자신들의 평결을 관철시킨 배심원들로 인해 배심제도는 법관이나 권력자들에게서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확립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19세기 초까지 모든 중범죄 사건과 대부분의 경범죄 사건에서 피고인의 유 · 무죄 여부는 배심원들에 의해 심리되었다고 하네요.
6. 미국의 탄생과 배심제의 부상
1776년 7월 4일,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한 대륙에서 역사적인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것이죠.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7월 4일을 전국적인 휴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으며, 이때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200 년 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미국의 탄생을 알리는 문서였죠. 그리고 미국의 탄생은 세계사뿐 아니라 배심제의 발전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미국은 영국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강력한 배심제도를 채택했거든요.
미국인들에게 배심제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미국이 독립하기 30여 년 전에 있었던 존 피터 젱어 사건입니다. 당시 미국의 한 주간지의 발행인이었던 젱어는 영국 총독을 비난하는 글을 싣게 되고, 이로 인해 선동죄로 기소됩니다. 젱어의 변호인은 이 재판이 영국의 지배를 받는 모든 미국인들의 자유와 직결된 재판이라고 배심원들에게 호소했고, 배심원들은 젱어에게 무죄평결을 내리게 되죠. 이러한 미국인들의 결정에 화가 났던 것일까요? 30년 후, 영국은 미국 식민지 주민들의 세법 위반 혐의에 대해 배심원이 평결을 내리는 민사법원이 아니라 배심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해사법원에 기소하게 됩니다. 결국 미국인들은 그 재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태도는 미국인들이 그동안 영국에 대해 쌓아 온 불만을 배가시켰고, 결국 미국 독립의 중요한 촉발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미국의 배심제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패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정서를 반영하듯, 실제로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영국의 “많은 사건에서 배심재판받을 권리를 빼앗은” 행위가 독립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또한 이 정신에 부합하여 미국의 헌법 제 3조 2항은 “탄핵 사건을 제외한 모든 형사 재판은 배심제로 한다”라고 명시하여 배심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미국의 법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형사뿐 아니라 민사의 영역에서도 배심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국 수정 헌법 제7조를 보면 “소송에 걸린 액수가 20달러를 넘는 경우에는 배심원에 의한 심리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며 이때 배심에 의하여 심리된 사실은 보통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미국인들이 배심원의 결정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시민들에게 서로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명시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형태의 배심제도였으며, 미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서 배심제도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나라 중 하나입니다.
7. To be continued…
오늘은 굵직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배심제의 역사를 빠르게 둘러보았습니다.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보니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신장과 일맥상통하는 제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현대 사회에서는 배심제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해외 주요 국가들과 한국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