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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두울 Nov 19. 2021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Part.1 폭력과 인간성

 맨부커상 수상작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의 소개 중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말이 있었다. 일본군에 의해 핍박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포로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겪은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난 겪지도 않았으면서) 바보 같은 경쟁적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뭐 얼마나 고통받았길래?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그중 일본군에 붙잡힌 전쟁포로들은 태국과 미얀마를 관통하는 길이 415km의 “죽음의 철도” 건설에 강제로 징용당하였다. 일본제국의 군대와 무기 수송을 위한 철로 건설에 참여한 약 25만 명의 연합군 포로 중 10만여 명이 사망하였을 정도로 그 노동의 강도가 심했다고 한다. 소설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 다양한 폭력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서술하며, 다양한 인물의 심리를 상세히 묘사하여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몸이 멀쩡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덜 아픈 사람을 골라 철도 건설에 참여시켜야 하는 무자비함, 그래서 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노역장으로 향해야 하는 전쟁 포로들의 처절함, 치료를 받으러 노역장을 이탈했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맞아 죽는 참혹한 광경, 그리고 고문당하는 동료가 숨이 끊어지지 않아 저녁 식사시간이 늦어지자 보이는 원망의 눈초리.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매우 경악스러운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전쟁 포로들의 삶을 접하고, 이 소설이 그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만 나왔다면 오히려 이 소설의 전형성에 실망했을 것 같았다. 세상에 만연한 폭력에 내가 무감각해진 걸까.

 이 소설의 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묘사에 있다. 그중 주인공 도리고 에반스의 양면적 심리에 대한 묘사는 각자를 돌아보게 만든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부서져도 얼마 남지 않은 일용할 양식을 병사들과 나누는 이타적인 도리고의 모습. 큰형님으로서의 책임감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약한 도리고의 모습. ‘영웅적인 도리고’을 기대하는 시선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자신을 버리고 위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 모습.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전쟁 영웅이지만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여자와 불륜을 일삼는 이중적인 모습.

 나를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드러나는 나의 외적인 모습과, 이러한 가식에 가끔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 내면의 나. 좋은 사람, 좋은 아들, 좋은 친구라는 역할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에 억누르는 본원적 욕망. 마음속에만 꽁꽁 숨겨두었던 내 모습들이 도리고의 내면 묘사를 통해 표현되면서, 까발려진(?) 기분에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나만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하였다.



Part.2 전가된 책임과 변질된 기억


 하루하루 포로들이 죽어나가고,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 바쇼의 하이쿠는 꾸준히 역설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쇼의 하이쿠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은 혼란과 쾌락으로 가득한 속세를 벗어나 먼 북으로 고된 길을 떠나는 숭고한 여정을 담은 시다. 전쟁 포로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할 때, 일본군 장교들은 인간적인 삶을 달관한 자의 시를 읊는다는 게 모순적이다. 이 책의 제목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에게는 먼 북쪽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밀치며 걸어야 하는 좁은 낭떠러지 길이지만, 일본군에게는 <오쿠로 가는 좁은 길>과 같은 일본 정신의 아름다움을 더 넓은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길이다.


 천황의 뜻 때문에 시작된 전쟁이었고, 천황의 뜻 때문에 무리한 철로 건설에 수많은 전쟁 포로가 희생되었으며, 천황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끔찍한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그런데 그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책임은 과연 천황이 지었을까? 포로들을 학대한 혐의로 무거운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말단의 조선인, 대만인 등이었다. 그들은 연합군 포로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은 전범이었지만, 동시에 일본군 치하에서 광기어린 폭력에 동원된 피해자였다. 그들은 황국 신민을 강요당했고, 황국 군인이 되었지만, 일본과 연합국 모두에게서 멸시를 받다가 결국 일본인을 대신하여 처형당한다. 천황은 물론이고 고타 대령, 나카무라 소령 등 철도 건설과 그 안에서 자행된 폭력을 주도한 ‘책임자’들은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처벌을 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법행위나 정치 비리를 저질러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면서도, 돈만 많으면, 권력만 있으면 소위 ‘꼬리 자르기’를 통해 책임 소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년 전 한 탈주범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불쾌하지만 아직도 현실이다. 세상과 마주할 돈과 권력이 없는 존재감 없는 사람은, 세상과 맞서지 못해 체념하고, 세상의 부조리에 순응하고, 맞서지 못했다는 이유로 질책의 대상이 된다. 맞서든, 맞서지 않든 패자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의 한 문장이 이를 설명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승자는 언제나 세상이었다(p352).”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면책된 나카무라의 기억 속 본인은 항상 너그러운 지휘관이었으며, 그가 포로들에게 한 짓은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타 대령은 자기 안의 선한 면을 발견하고 ‘살아있는 부처’가 되겠다고 한다. 반성도, 참회도 없이 천황의 선한 뜻을 행하려 했던 자신들을 긍정하고, 아름다운 시를 읊으며 죽어가는 전범들의 모습은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을 안긴다. 철도 건설을 위해 죽어간 전쟁 포로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인 녹슨 열차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어 일본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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