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내면서 단 한 사람의 독자에게라도 진정한 공감을 얻으면 그걸로 족하다.라는 초심을 깨워 준 고마운 인사였다.
나조차도 잊어버린 시집 속의 저 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재판까지 찍긴 했지만 시집이란 게 서너 편 읽어보고 덮어버리면 지워지는 책.
그중에저 시를 읽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의 하향평준화로 너무 시집이 많은 세상.
시집이 너무 많아서 역설적으로 시를 읽지 않는 세상.
시가 시답잖아 시가 없어진 세상.
편식하는 아이에게 김밥이나 비빔밥에 넣어 먹이는 것처럼
이야기란 상추나 고기쌈에 시를 넣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시집 속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슬픔에 기대다
운다
기대어 운다
소리 내 운다
내 어깨에 기대어 소리 내 운다
내가 만든 슬픔이 아니고
내가 줄여 줄 수 있는 슬픔도 아니다
그저 어깨 내어주면 된다
그 어깨
휘청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어깨 내주고
같은 곳 오래 바라보면 된다
어깨에 배어드는 슬픔
그만큼만 덜어주면 된다
아홉수라 불리는 나이는 경계를 넘어가는 나이다.
그 경계는 개울이나 강처럼 구분된다.
아홉과 열아홉은 대부분 작은 개울 만난 듯 가볍게 뛰어 건너가지만,
그 이후의 아홉수는 사람마다 다르다.
제 의지 확고하고 방향이 잡혀있는 사람은 제 앞에 그대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 지나기도 하지만,
다리도 만나지 못하고 배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의 아홉수는 고민이 깊다.
특히 마흔아홉의 강은 대부분 강폭이 넓어서 쉰두, 세 살까지의 호수만 한 큰 강을 노 저어 건너야 하는 부부가 많다. 서로 팔힘도 생기고 바라보는 곳이 다른 경우도 많아서 서로 돕지를 못하고 자기 방향으로만 노를 젓는다. 배는 제자리를 빙빙 돌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그때를 다른 말로 갱년기나 우울증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내 주변 친구나 선후배 중 많은 이들이 49살과 53살 사이의 나이에서 배가 뒤집혀 다 젖은 몸으로 이혼도장을 찍고각자 다른 강둑으로 올라가 버렸다.
떳다방 사진전이라는 프로젝트 빔 사진전이 있었고, 뒤풀이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사진작가 L이 충무로 자기 작업실 옥상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일행은 맥주 등을 근처에서 사가지고 L의 사진작업실을 둘러본 후 일렬로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문 잠겼다"
사이에 있던 L이 사무실로 열쇠 가지러 내려간 사이에 나란한 줄 뒤쪽에 있던 내가 비상문을 여니 그곳은 3층 사무실 인원들이 사용하는 긴 의자가 놓인 흡연실이었다. 뒤에 있던 몇이 들어오고 그 친구도 따라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담배 냄새 나, 먼저 올라가"
"괜찮아요"
잠시 후 옥상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굵고 짧은 담배를 물었던 둘은 서둘러 재떨이에 불꽃을 떨구고 위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는데,
아주 작은 물묻은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그리곤 기댄 어깨너머에서 파도 같은물결이 어깨로 넘어왔다.
그때 그 친구 나이가 마흔아홉 근처 아니었을까?
슬픔은 내 안에 깔려있는 물이다. 잘 막고 있던 뚜껑이 어느 순간 무엇엔가 밀려 뚜껑이 열린다. 마음이 습기로 가득 차면 이내 몸으로 배여 나온다.
눅눅한 몸은 산책이나 여행으로 말릴 수 있지만, 몸이 젖을 정도면,
마음을 꺼내 말려야 한다.
꺼내지 않으면 고인 물은 굳어지고 딱딱해진다. 덩어리 진 슬픔은 그 마음을 지닌 몸을 굳게 만들어 병이 된다.
혼자서 키우는 슬픔은 점점 더 커져 제 동굴을 만들지만 슬픔의 눈물이란,
수줍음이 많아서 누군가 바라봐주면 쉽게 마른다. 들키기 싫으니 자주 나오기 어렵고 못 나오면 점점 작아져, 주변에서 바라봐 준 인연들의 따뜻한 시선으로 기억되는 따뜻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