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8. 꿈
이립(而立).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공자는 역시 현자였다. 춘추전국 시대의 극도의 사회적 혼란기를 겪었음에도 학문의 깊은 뿌리를 둔 그는 단단했다. 그에 반해 30 하고도 7년을 더 산 나는 개업한 지 한참 지나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주유소 앞, 자리만 차지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또 뭐 해 먹고살아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지러이 휘둘려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런 고백하기 조금은 창피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나의 천직을 찾고 있다. 여러 번의 직업을 거쳐 지금 하는 일로 들어섰지만 아직도 회사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겉돈다. 언젠간 찰떡같이 잘 들어맞는 일을 찾고 커리어 우먼이 되어 “포기하지 마세요. 꿈은 이루어져요. 꿈을 꾸세요”같은 멘트를 팍팍 휘날리며 인생 한 번 맛깔나게 사는 그런 삶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인생 전반에 걸친 나의 직업 찾기 여정은 실로 대단했다. 어렸을 적엔 위대한 어른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그들 말대로 열심히 공부만 한다면, 원하던 인생의 대답을 찾는 것은 물론이요, 출세의 문이 열릴 줄 알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단발머리를 하고, 줄이지 말라는 교복도 크게 입고선 죽자 사자 공부해 대학(大學)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웬걸. 큰 배움의 꿈을 안고 들어간 그곳은 내가 어떤 사람이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사유하는 것엔 관심도 없었다. 졸업반이 되자 학교는 나를 취직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다. ‘잠시만요, 저는 아직 제가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취업해서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는 말에 또 속아버려, 4년간의 종합 트레이닝을 거쳐 회사들이 원하는 자격증과 필요한 점수를 차곡차곡 모으는 수집가가 되어버린 후 등 떠밀려 사회인이 되었다. 그 많은 돈을 주고 배운 것이 큰 깨우침이 아니라 ‘소백산맥’을 잘 마는 법과 ’ 랜덤 게임‘이고 이것들이 전공 지식보다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역시, 어른들은 거짓말쟁이.
학문에서 답을 찾지 못해 이번에는 종교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4차 혁명 시대에 AI가 소설을 쓰고 업무를 보는 와중에 호랑이가 곰방대로 담배 피우던 시절 소리를 하냐 싶겠지만 나는 그만큼 정말 간절했다.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직업 딱 하고 내려주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사 하나님께 자그마치 37년간 기도를 올렸으나 응답받지 못하고, 사주쟁이와 무당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주와 점사를 넘나들며 하루가 멀다 하고 보던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한 점쟁이로부터 듣게 된다. “너, 무당 사주다. 그러니까 자꾸 이런데 오지 마. 그러다 네가 무당 사주 봐준다.” 오 마이갓. 무당이라니. 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이번 생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그 뒤로 신당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한다.
나는 오랜 시간 행복에 이르는 방도로써 사회가 인정해 주고 가치를 올려주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 믿었다. 내 양말 한 짝 빨아 본 적 없고, 나 먹을 김치찌개 하나 뚝딱 끓여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의사가 된다면, 변호사가 된다면, 두루두루 인정받고 쭉쭉 뻗어나가는 삶을 살게 될 테고 이게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삶이라 믿었고 교육받아 왔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내가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을까. 심히 의심스러웠다.
70년도 구호처럼 ‘무조건 하면 된다’를 외쳐대며 불도저같이 앞만 보고 달려가도 끝내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할 수 있으며, 이는 스스로가 나태해서도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님을 이제는 안다. 그 순간의 상황과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될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고 내 탓을 하기 바빴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인생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삼시세끼 나를 위한 반찬과 국을 완벽하게 끓여내 스스로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분리배출을 야무지게 하며, 환경을 생각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알뜰하게 살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기뻐하고 슬퍼하며, 이런저런 세상의 규범에 대해 어느 정도 순응하며 반할지를 알아가며 나에 대해 똑 부러지게 말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40세, 불혹(不惑)이 되어서는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기더라도 판단을 흩트리는 일 없는 심지가 굳은 사람으로 살아있길 기도한다.
P.S. 소백산맥이란 소주, 백세주, 산사춘, 맥주를 1:1:1:1 비율로 만든 폭탄주다. 취향에 따라 비율을 달리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