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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숙 Nov 26. 2024

한지의 특성

우리나라 전통 종이인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순수한 한국 종이로,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 서양의 양지(洋紙)와 구분된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한 우리나라 고유의 수초지(手抄紙)로, 발이 촘촘하고, 두껍고 질긴 것이 특징이다. 빛이 하얗고 품질이 뛰어나 신라 시절부터 중국에서 ‘백무지(白無紙)’로 알려졌으며, 송나라 사람들은 여러 나라 종이 중에서 고려지를 최고로 평가했다.

     

한지는 가을에 채취한 닥나무를 사용해 만드는데, 리그닌과 홀로셀룰로오즈 성분이 이상적으로 함유되어 있다. 리그닌은 나무와 같은 식물체의 세포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화합물로, 축적되면 세포 분열이 멈추고 조직이 단단해진다. 또한 한지는 알칼리성인 잿물로 표백하며, 닥풀(황촉규)을 접착제로 사용한다. 잿물의 주성분은 산화칼륨(K2O)으로, 이 성분의 양에 따라 염기도가 결정된다. 이외에도 인(P2O5), 산화나트륨(Na2O), 산화칼륨(GaO) 등의 성분이 많아 한지는 약알칼리성 특성을 띤다.

    

닥풀은 종이 제작 시 섬유를 접착시켜 종이의 강도를 높이고, 얇은 종이를 만드는 데 유리하다. 또한 닥풀은 종이의 산화를 빠르게 진행시켜 젖어서 겹쳐진 종이가 쉽게 분리될 수 있도록 돕는다. 닥풀은 종이를 뜰 때 접착력을 높여 종이의 강도를 증가시키며, 이로 인해 한지는 천 년 이상 보존될 수 있다. 한지는 단순히 오래가는 것뿐만 아니라, 양지에 비해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자연 친화적인 성질을 지닌, 살아 숨쉬는 종이다. 한지의 제조 공정이 펄프 종이에 비해 더 과학적이라는 점에서도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반면, 양지는 로진사이즈 처리와 황산알루미늄 사용으로 인해 강한 산성(pH 4-5.5)을 띠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가수분해가 일어나 누렇게 변색되고 분해된다. 결국 100여 년이 지나면 사용이 어려워진다. 한지는 pH 9.5 이상의 알칼리성을 띠며, 시간이 지날수록 결이 더 고와지고 수명이 천 년 이상 지속된다. 이러한 제조 공정의 차이로 인해 한지는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지만, 펄프 종이는 오랜 시간 보존이 어렵다.

     

한지는 자연 친화적 특성 덕분에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조절하는 종이로, 조상들은 한지를 ‘살아있는 종이’라 부르며 집 안을 꾸몄다. 나무로 만든 문살에 한지를 발라 문과 창문을 만들고, 바닥에는 기름을 먹여 장판처럼 사용하며 벽에도 발랐다. 이로 인해 한지는 방 안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한지는 장식성과 실용성이 뛰어나,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은은한 정감이 있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반영한 종이로 여겨졌다.

     

한지는 연약해 보이지만 매우 질기고,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있으며, 우리 민족성을 대표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통기성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감촉과 유연한 접힘을 가지고 있으며, 먹물에 대한 발묵 효과와 빠른 흡수성도 우수하다. 또한, 방음성과 계절에 따른 보온성까지 탁월하여 일반 종이에 비해 훨씬 우수한 특성을 지닌다.

     

우리나라 종이는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명나라 도륭의 『고반여사』에서는 고려지를 ‘견면으로 만들어 빛은 희고 비단 같으며, 단단하다. 글씨를 쓰면 먹빛이 아름다운데, 이는 중국에서 나지 않는 진귀한 물품이다’라고 소개했다. "지천년 금오백년(紙千年 綿五百年)"이라는 말처럼, 한지는 천 년을 가지만 비단은 오백 년밖에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3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하며 한지의 내구성을 증명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은 한지의 뛰어난 보존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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