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잉태와 태동, 탄생 가운데 느꼈던 여성에 대한 경이감

by 김상원

예수의 생애 서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다.


뜻 모를 임신에 두려움과 번민에 휩싸인 마리아는 사촌인 엘리사벳을 만나 위로받고, 임신한 두 여인 간의 공감과 유대, 배려가 느껴지는 따뜻한 순간을 담담한 어조로 성경은 기술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하는 소리에 내 태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이전에는 저 텍스트를 단순히 수사적 찬사로 지나쳤다. 하지만 지난 열 달간 뱃속 아이의 태동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서, 태중 아이가 뛰놀았다는 그 말씀이 비로소 살아서 다가왔다. 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문장인가.


이 텍스트의 저자들이 누구인지는 결코 알 수 없으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위로, 그리고 마리아의 찬가 - 마니피캇은 결코 남자들이라면 상상하여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임신 후반기가 되면, 아이는 엄마의 명치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자리하게 된다. 엄마 입장에서는, 자신의 심장 옆에 자신이 빚어낸 다른 심장이 함께 하는 셈이다.


두 개의 심장이 맞닿아 있기 때문일까.

주변인으로서 관찰한 태아와 엄마는 서로 모든 감정을 공유한다. 엄마가 긴장하고 있으면 아이도 긴장하여 잠잠해있고, 엄마가 놀라면 아이도 요동을 친다. 엄마가 편안하면 아이도 편안히 뒹굴고, 엄마가 기쁘면 아이도 뛰논다. 결국 태중의 아이가 기뻐 뛰놀았다는 말의 본질은,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 지극히도 기뻤다는 의미이다.



모든 여인들은 결국 잉태와 출산, 아이라는 무의식적 상징을 공유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리아가 왜 멀리 시집간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갔을까? 아마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아주 어릴 적부터 서로 의지하며 친자매처럼 지냈던 듯하다.


엄마가 되어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열 달간 지켜보며, 그리고 주변 여성들과 함께 형성해 가는 감정적 공동체를 바라보며.

관찰자로서 지켜본 여성들 간의 호의와 연대, 그들이 보여주는 보호 본능은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할머니 - 어머니 - 딸’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통과, 여성 동료들과 친지, 이웃 간에 나누는 수평적 연대. 이전에 몰랐던 세상의 텍스트들이, 한 아이의 태동과 출생으로 인해 채색된 컨텍스트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성서에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복되고 기쁜 말만 적혀있진 않다. 마니피캇 찬가 이후 예언자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훗날 이 아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깊게 꿰찔릴 것이라 말한다.


어머니와 아이는 한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심장을 맞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의 옆구리, 심장이 꿰뚫리는 그 고통은 어머니에게도 동일한 고통이다. 그 둘 사이에는 영혼의 인장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소중한 두 여인의 보호자로서 그들의 평생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녀들은 여성들만이 겪을 고통, 그들만의 아픔과 슬픔을 남은 생애 내내 서로 나눌 것이다. 남자로서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말들로. 때로는 본능적인 몸짓으로.


다만 나는 남편으로서, 그리고 딸아이의 아버지로서.

내 여인들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사히 보호받고 오래도록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오늘도 작은 조약돌을 쌓아 올릴 뿐이다. 엘리사벳의 남편 즈가리야가 노래했듯, 나는 그저, 내 아이 보다 세상에 먼저와 그의 길을 마련할 뿐이니. 그 길을 따라 우리의 발이 평화 가운데로 인도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