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날,
그날은 4주간 출산 휴가의 첫날이면서 아내와 아기가 처음 새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고, 성탄절 이전 가톨릭의 대림주간 첫 월요일이기도 했다.
내 나이 마흔이 되기 전 마지막 한 달.
이처럼 묘한 시기에 여러 일들이 흡사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것은 그냥 우연일까. 이런 신비를 통해 세상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느 해와는 다르게, 이 아이가 집에 온 첫날부터 나 또한 잠들지 않기로 했다. 어떤 예감에 그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후 자정부터 동트는 겨울 새벽까지, 12월 내내 나는 젖먹이와 함께 밤을 새웠다. 세밑의 겨울밤은 길고도 어두웠다. 수유등의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밤새 창가를 서성였다.
모두가 깊게 잠든 밤.
산중 목동이 동트기를 기다리듯.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
‘요셉’.
세례명이자, 평생 동안 불리워진 또 하나의 내 이름.
석공이자 목수로 육체노동을 하며, 가난한 계층의 가장이었던 요셉은 생전에 어떤 영광과 명예도 누리지 못했다. 다만 그는 땀 흘렸고 겸손할 줄 알았으며, 순종과 인내로 침묵했다.
박해를 피해, 산중에서 옹기와 석탄을 팔아 살던 교우촌 사람들은 사내아이라면 으레껏 요셉, 베드로, 요한, 안드레아 같은 이름들을 세례명으로 삼곤 했다.
아마도 엄숙한 가톨릭의 교부 학자들보다는, 목수나 어부 같은 순박하고 땀내 나는 이들을 친숙하게 선호했을 것이다. 더욱이 외가 증조부 또한 목수이셨으니, 아마 요셉이란 세례명은 뿌리부터 친밀했으리라.
다만 지나온 내 삶은, 조상들의 땀 내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히 요셉이란 신원도, 선조들과의 관계도 무심해지며 점차 신앙을 냉담히 대해갔다.
밤이 깊어가도록 창밖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같은 처지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내 생애 지난날들의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왜 하필 이 아이는 내게 찾아왔을까.
수많은 부모들 가운데, 왜 나를 부모로 선택했을까?
더 젊고, 또 풍요롭고 따사로운 환경도 많았을 텐데. 그에 비하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야심에 젖어 일생을 살아온 사람인데.
너는 무엇을 위해, 하필 우리 집으로 몸을 받아 찾아왔니?
품 속에 나직이 속삭여보지만, 아이는 새근거리며 침묵할 뿐이다.
그 요셉 성인도 이처럼 칭얼거리는 어린것을 품고, 겨울의 긴긴밤을 지새며 사막을 건너 이집트 국경으로 향했을까.
순간,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원이 떠올랐다.
내 삶을 잠시 비춘, 12월의 설명하기 어려운 그 우연에.
그것은 이것이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신원, 내 삶의 바탕이었다.
가난한 목수 집안의 증손주.
그리고 한 젖먹이의 보호자.
겨울밤의 끝은 도둑처럼 살포시 찾아온다.
어둠과 새벽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가, 차츰 거리의 불빛들이 가물가물 꺼지기 시작하면. 어둠이 옅어지며 도시의 윤곽이 메마른 몸을 드러낸다.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먼동에서 흘러올 때, 아이는 내 품에 안겨 있고 아내는 건너 방에서 깊게 잠들어있다.
태중에서 빚어지기 전부터 나를 알았고
또 여지껏 내 삶을 가호해온 나의 아이.
길고 긴 대림의 밤, 젖먹이와 함께 지새운 어두운 밤.
훗날 이 아이가 떠날 길을 나 먼저 떠올려 본다.
이 어린것의 삶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따를지,
나 미리 알 수 없으나
다만 내가 이 아이에게 쥐어줄 것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온 신앙의 뿌리와 너의 세례명뿐.
부디 그 세례명을 너의 진북(眞北) 삼아
춥고 어두운 밤, 적막한 사막을 건너
태어나기 이전부터 네가 뜻했던 바를
무탈히 이뤄가길 나는 바랄 뿐이다.
이제 막 잠이든, 작고 귀중한 품 안의 내 딸.
귀한 아기. 나의 대림(Adv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