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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 Jan 27. 2022

혁신이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에 관해

"현대사회는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면서 효율이 크게 올랐다고, 또 기계가 노동을 몰아낸다고 한다. 하지만 일시적인 경우나 가격 저하가 이윤을 감소시킨 경우를 제외하면, 기계는 노동을 대체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실제로는 직접 노동이 간접 노동으로 넘어간 것이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농가 자신을 포함해서 10개의 가구를 먹여 살리려면, 9개의 농가가 필요했다. 지금은 농가 자신을 포함해서 10개의 가구를 3개의 농가가 먹여 살릴 수 있다. 농업의 효율성이 100년 동안에 3배 정도 증가했다. 실제로는, 6개의 농가가 직접적인 농산물 생산에서 간접적인 농산물 생산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제 이들은 석탄, 철, 목재, 비료, 철도, 고속도로, 증기선, 농업기계, 창고로의 물품배달, 기타 등, 하나같이 농산물을 간접적으로 생산한다. 실제로는, 9개의 가구가 예전에는 농산물 직접 생산에 종사하고 한 가족이 간접 생산에 종사한 반면, 지금은 3가구만 직접 생산에 종사하고 7 가구는 농산물 간접 생산에 종사하는 것이다. 농업의 효율은 직접 노동의 산출로 측정하지 말고 직간접 노동 양쪽의 산출로 측정해야 한다. 국가 전체가 농업의 효율을 늘리는데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늘어난 농업효율은 국가 전체 산출을 늘리기 위해 노동을 풀어주었다. 늘어난 농업 효율이 나라 전체의 산출물 증대를 위한 노동력을 방출해 옴으로써, 나라 전체가 늘어난 농업 효율에 기여해왔다."


우리나라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최근까지 노벨경제학상을 휩쓴 제도학파의 시조격인 J. R. 커먼스(Commons)의 "제도경제학Institutional Economics"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이 작성된 건 1924년 미국이다. 100년 전 미국 사회에서도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사회에, 특히 일반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우리는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져가는 것을 기술의 혁신이라는 이유에서는 그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어느새 맥도날드와 김밥천국에서는 주문을 사람이 아닌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사라진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혁신과 효율로 인해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계 혹은 다른 무언가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길거리에 내쫓길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는 100년 전 미국이나 10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커먼스가 제시한 설명은 꽤 명확하다. 농부로서 일하지 않아도, 그래서 농업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산업 분야에서 종사하며 생산하는 활동이 간접적으로 농업의 효율을 늘리는 데 기여한다는 논리이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다른 산업 분야의 일자리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산업 분야의 끊임 없는 효율을 위한 수요가 있다는 것인데, 인간은 그럼 그 변화에 단순히 저항하는 것일까?

변화하는 산업 구조와 그에 따른 생산과 효율을 결정하는, 특히 노동력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까?
주문 받는 기계를 더 이상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된다면, 원래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을까?


Photo by Louis Hansel on Unsplash



이것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이다. 


지금이야 배달기사와 택배기사가 너무나도 힘겹게 노동력을 써가며 필요한 물건들을 배송하고 있지만,


앞으로 배달과 택배를 기계가 대체한다면 그 많은 배달기사와 택배기사는 어떤 다른 분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이 변화는 국가 전체의 경제 효율에 기여하는 것이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공항 주차장의 요금 징수를 기계가 대체하면서 실직한 징수원들은 공항 앞에서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다. 그들은 혁신을 반대하고 변화에 적응 못하는 고루한 존재로 치부될 수 있는가?

다른 산업분야로 전환되지 않고, 채용도 고용도 쉽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이미 예고되어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전기차를 구매하고 있다.
전기차가 뉴노멀이 된다면, 동네 곳곳에 있는 정비소는 사라져갈 것이다.


효율 증가도 다른 산업으로 간접적인 기여가 이루어지는 것도 좋다.
문제는 그 과정, 프로세스, 전환이라는 중간단계를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고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를 사람들이 "연착륙"하게 할 수 있는 어떠한 과정, 매개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에야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커먼스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없었던 실업보험을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 도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경제학자였다. 그는 바로 이러한 제도를 '진화적 장치'로 보았다. 사회는 끊임없이 이해관계가 충돌하지만 그것은 점진적으로 하지만 확실히 발전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역할은 국가에 의해, 그리고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구조로, 그 충돌을 중재하여 그 충돌을 조화,와 타협으로 바꾸어 진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매개체가 바로 '제도'이다.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전장치로, 또 그 변화를 더욱 보편적인 혜택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제도의 기능이며, 국가의 역할이다. 그 과정에 관련된 전문가는 물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적 구조라는 점에서 커먼스는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는 경제사회의 변화를 파괴적이지 않은 진화적 발전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사회경제적 과제의 해결 접근법의 시작은 그런 의미에서 참여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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