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기술을 활용한 기록의 보존과 재생산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유네스코에서는 과학 및 기술정보 서비스를 개발하고 도서관, 기록보관소 및 문서화를 위한 기관의 발전을 지원하며, 이를 위한 정보 처리 규범 및 표준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정책을 촉진하는 일반정보프로그램(General Information Programme, PGI)이 운영되었다. 이것은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하여 전 세계적으로정보를 처리하고 보급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와 교육을 통한 인적 역량을 향상하여 국가 간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어 1990년 유네스코에서는 정보커뮤니케이션 섹터(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Sector, CI)가 세워졌다. 유네스코는 1) 교육, 2) 자연과학, 3) 인문사회과학, 4) 문화, 5) 정보커뮤니케이션이라는 5개 섹터를 기반으로 한 국제협력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평생학습,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생물권보전지역,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유산 및 무형문화유산이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유네스코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앞으로 등장할 세계기록유산은 문화 섹터가 아닌 CI 섹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1년부터 유네스코에서는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의 기술발전 및 기록유산의 보호, 접근 증진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활용한 기록의 관리 및 접근성 증대에 대한 구상은 당시의 기술발전이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과 연계된 문제였다. 이에 따라 기존 등재된 세계유산과 자연유산의 이미지를 디지털화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더불어 미의회도서관에서는 American Memory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등장했다. 1990년부터 이 프로젝트는 영화, 비디오, 음원, 도서, 사진 등의 미국역사와 문화에 관련한 콘텐츠를 디지털화 하여 무료로 대중들에게 보급하려는 시도로서 전개되었다. 수십년간 물리적인 문서와 건물을 통해 접근성을 제고하려 시도했던 도서관은 이제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도서관이라는 방식으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게 되었다.
냉전 종식으로 인한 새로운 국제질서에서는 미국 주도의 영구적인 평화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1992년 8월 희귀본과 다양한 지적 유산을 포함한 200만권의 장서가 소장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도서관이 파괴되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이 파괴행위는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벌어진 인종 청소 및 기억살해로서 다민족, 다종교적 정체성이라는 공존의 기억을 말살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문화살해'(culturicide)로 인식되었다. 3일 동안 화재로 사라진 기록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었다. 기록의 손실이 인류에게 '해로운 빈곤'(harmful impoverishment)이 된다는 유네스코의 표현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문화적 자산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용한 기록의 보존역량을 강화하고 접근성을 확대하고 문화간 소통과 지적 역량을 증진하는 구상은 공존과 평화의 국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지적 협력을 위해 설립된 유네스코의 핵심 목표와 일치했다. 이에 따라 1992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는 '세계의 기억' (Memory of the World)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위험에 처한 기록물의 보호를 위한 고품질 사진 메모리 생성과 다양한 매체의 생산기반'을 언급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전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이는 기록의 보존이라는 근원적인 보호의 맥락 뿐만 아니라,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저장하고 재생산하는 현대의 기술 혁신을 적용하여 기록유산을 매개로 한 인류의 축적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라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세계기록유산은 지식의 공유를 통한 인류의 소통과 공통의 기억이라는 미래지향적 방향에서 설계된 문화와 과학기술의 융합적 시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