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억'이 가지는 의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의 정식 명칭은 'Memory of the World (MoW) Programme'이다. 국내에서는 보통 줄여서 MoW 프로그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계기록유산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주변 국가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세계의 기억'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한다.
유네스코는 왜 '기록'이 아닌 '기억'에 주목했을까?
그 이유는 공식 명칭 '세계의 기억'이 상징하는 기록에 담긴 인류의 집단적 기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MoW 프로그램은 디지털 시대에 기록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접근으로 탄생했다. 1992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MoW 프로그램의 도입을 선언하면서 '위험에 처한 기록물의 보호를 위한 고품질 사진 메모리 생성과 다양한 매체의 생산기반 마련'을 촉구했다. 이는 기록물 자체에 대한 보존노력 외에도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여러 매체를 통한 복제와 재생산을 고려한 것이다. 기록이라는 물체 그 자체의 중요성에 더하여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가치를 함께 바라본 것이다.
기록Document의 범위는 다양하다. 돌, 금속, 나뭇잎, 양피지, 종이 등을 이용한 기록은 역사, 문화, 언어 사상, 기술, 정체성 등에 대한 다양한 인류의 흔적을 남겨놓았고, 이는 인류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억을 창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경우를 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별개의 국가를 삼국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낳았다. 그리고 단군을 시작으로 삼국과 가야의 이야기를 담아 역사적 '계승의식'을 담아낸 삼국유사는 고조선-삼국-고려의 민족적 정체성, 공유된 기억을 창조해냈다. 기록을 통해 지식과 문화가 여러 세대를 통해 전승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책 한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관련된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이 된다. 유네스코의 공식 문서인 일반 지침에는 이를 '집단적 기억상실'(Collective Amnesia)로 표현하고 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2009년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없다면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와 보편적 인권을 위한 인류의 노력을 위한 공감대는 약해지고, 잊혀져 또 다시 갈등과 혐오의 시대를 반복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유네스코는 한쪽의 일방적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록에 담긴 의미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학의 거물 E. H. Carr의 명언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를 인용하며 '역사란 1차 자료와 그 지속적인 해석의 상호작용'임을 밝히고 있다. 일방적인 '정답'을 주기보다는 기록에서 주는 영감과 통찰의 문을 모두에게 열어놓은 것이다.
<동의보감>이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다.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 이후 선조 임금은 어의 허준에게 명해 의서 편찬을 지시했다. 향약을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나고자라는 약초와 효능에 대해 백성들이 알고 스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의학지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계기록유산(세계의 기억)으로서 동의보감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보편적인 세계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이라는 '국가'에 의해 의서 편찬을 통한 '국민 복지'라는 정책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아프면 병원가고 약처방을 받는' 일상적 삶은 사실 국가의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동남아에서는 2000년대에서야 건강보험이 처음 등장했고, 지금도 미국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복지로서의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국민의 보건을 위한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되어 조선의 선구적 정책으로 이해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이 되기 위한 조건은 이렇게 세계적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기록의 형태, 희귀성, 소유권, 법적 지위 등 물체로서의 특징도 중요하지만, 그 기록이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적 관점', 즉 세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도 적용되고 이해될 수 있는 가치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기록이 현재까지 전 세계 570점이 등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과학, 기술, 여성 등 다양한 소재를 담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