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림사 비석 (2025년 등재)

by JS

중국의 잘 알려진 여행지와 문화는 확실히 지난 세기부터 이어진 개혁개방의 역사와 연결된다. 넓디 넓은 대륙 가운데 가장 친숙하게 다가오는 문화적 산물은 요리에 있다. 붉은 고추로 만든 빨갛고 매운 맛의 사천, 청나라 말기부터 열강에 의해 가장 빨리 개방된 지역으로 다양한 음식재료가 문화와 기술이 만나서 탄생한 딤성으로 대표되는 광동, 춘추시대 제나라와 노나라가 있었던 시기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음식 맛을 내는 근본으로 소금산지가 있던 산동, 달고 시고 짠 맛이 향기로운 맛과의 조화를 이루는 불도장의 복건, 아름다운 산수를 담아내는 절강의 다양한 요리는 오늘날 중국의 발전과 함께 공유된 문화적 산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중화문명의 중심지로 수천년을 유지했던 하남의 요리는 화려했던 과거를 되새기기 힘들정도로 기억 속에 사라져 버렸다.


public 다양한 중국대륙의 음식문화를 상징하는 그림에는 하남성의 대표 음식이 없다 (출처: Allison Jiang)


하남성은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지금도 1억에 가까운 인구가 살지만 그 화려함은 다른 지역에 건네준 것에 모자라 중국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해버렸다. 하남성 출신이라고 대놓고 취업에서 탈락한 사례도 있으며, '도둑놈이 많다' 등의 지역비하까지 존재한다. 강물이 탁해질 정도로 공장에서 돈을 벌기위해 힘든 노동을 하고도 질병과 바꿨다는 하남성 출신의 래퍼가 부른 노래 가사가 거대한 중국 사회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현 하남성에 있는 낙양과 개봉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당(주)나라 측천무후의 시기와 송나라 시기에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화려함을 자랑했다. 가장 화려한 시기 등장했던 요리 낙양수석은 측천무후가 건조한 날씨 쏙에서 피부관리를 위해 먹었다는 24가지 음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너무 가지 수가 많아 12가지만 취급된다고 한다.


Water-Banquet.jpg 낙양수석 (출처: china 7 day)


낙양의 흥망성쇠는 중국사의 거대한 흐름과도 연결되어 있다. 통일 한제국이 무너지고 삼국시대부터 향후 400년 이상 중국 대륙은 대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삼국을 통일한 사마씨의 서진 왕조는 내부 권력다툼을 하다 주변 이민족을 끌어들이며 중원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5호 16국이라 불리는 이 시대는 5개의 이민족을 중심으로 130여년 동안 16개 이상의 나라들이 화북지역에서 난립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후 화북지역을 통일한 이민족 왕조들의 북조,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가 정권을 세운 남조 왕조의 대립은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이어졌다. 이 혼란의 시기는 반대로 요동지역을 지배하며 성장한 고구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386년 탁발선비에 의한 화북의 통일왕조가 등장했다. 수백년 전 흑룡강성 알선동이라는 동굴에서 시작한 탁발선비의 이주와 정복의 역사는 이후 정착한 낙양에서 화북지역 전체를 통일하고 수당시대라는 중국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의 번영을 낳는 기초를 쌓았다. 북위 태무제 시기 화북통일 이후 선비족과 한족의 공존 문제와 장기간 이어졌던 전란의 시기를 수습하는 문제는 문화와 제도에서 두드러졌다. 효문제 시기의 한화정책은 선비족에게 한족과 결혼을 장려하며 같은 이름을 쓰게하고, 한족 출신의 관료를 기용하기도 했다. 한화정책이 한족 우대정책이라기보다는 다수인 한족의 불만을 잠재우면서도 지배층인 선비족 외에도 당시 유입된 고구려, 아랍인, 유목민 등의 다종족으로 구성된 화북 지역의 통치를 위한 방안이었다. 이는 특히 효문제의 낙양천도로 상징화되었다. 당시 낙양의 인구 10만 9천호 중 외국인의 인구가 11.9%에 달했다고 하니, 호한(胡漢)체제, 호한융합은 다민족사회의 공존과 발전을 위한 오늘날에도 유효한 중요한 시사점을 남겨준다. 참고로 세계적인 대도시인 대한민국 서울도 현재 외국인 인구가 2%대이다.


184년 황건의 난 이후 589년 수나라의 통일 전까지 400년 이상 이어지는 중국대륙에서의 대혼란과 분열은 사회불안과 정신적 공백으로 인한 구심점을 필요로 했다. 한대의 유교만으로는 지배층은 물론 다수의 민중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부족했다. 노장사상은 구원보다는 지배층의 기행과 은둔으로 상징되었다. 지적인 교리를 넘어 현실의 복락을 위한 구제의 신앙을 필요로 하여 북조는 다수 한족과의 융합을, 남조는 한족의 남방 이주와 귀족중심의 문화적 향유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적 요구가 탄생한 것이 바로 불교이다. 이 때에 이르러 불교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Kumarajiva_at_Kizil_Caves%2C_Kuqa.jpg 쿠마라지바 (출처: 위키피디아)


지금도 이질적인 인도와 중국 문명의 만남은 수백년의 시간을 걸친 이해의 과정을 필요로 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기 위해서는 먼저 한자로 경전이 번역되어야 했다. 초기 노장사상과 유교를 바탕으로 진행된 번역은 인도에서 건너 온 쿠마라지바의 지대한 기여로 현대적 상식으로까지 동아시아에 뿌리깊게 스며들었다. 사람을 얽매어 부린다는 의미의 Klesa는 초기 '결사'라는 단어에서 '번뇌'로, 깨달음이란 뜻의 'Bodhi'와 중생이라느 뜻의 'Sattva'는 보리살타, 줄여서 '보살'로 번역되었다. 서양에서도 잘 알려진 Nirvana는 도교가 자리잡았던 중국에서 초창기 '무위'에서 '열반'으로 번역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동서남북의 공간 개념이 함께 들어간 Loka-dhatu는 '세계'로 번역되었다. 현대인의 언어로 상식이 된 이 단어들의 등장은 바로 쿠마라지바의 불경번역과 함께 남북조시대 불교가 적극적으로 수용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거대한 석굴에서도 볼 수 있다. 운강, 돈황, 용문 석굴은 모두 불교의 도입과 함께 막대한 인력과 재산을 동원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통합을 다지며 신앙을 중심으로 민족을 융합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평가된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소림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494년 효문제의 낙양천도가 있은 후 1년만인 495년 낙양 근처 숭산에 만들어진 소림사는 인도의 발타선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숭산은 도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숭산이 중국의 명산 오악 중 하나인 중악으로서 봉선이 행해졌다는 면에서 유교, 도교, 불교가 만나는 중국 고유의 문화적 융화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상징이다.


1*MRBhNYshRszu9rFB6fA09A.jpeg 숭산과 소림사 (출처 Pavel Dvork)


소림사가 유명해진 것이 무술로 상징되는 수련이라면, 그 시작은 달마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스리랑카)의 3왕자였던 달마대사는 527년 소림굴이 들어가 9년 동안 면볍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달마대사를 통해 깨달음이 글이나 말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직관하여 수행하는 '선종'이 창시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달마대사와 선종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신앙의 지향성 면에서 보편적 접근을 제시하는 중요한 스토리가 있다. 당시 남조 양나라의 무제는 황제보살이라 할 정도로 불교를 신봉하여 수도 남경에 많은 사원과 불상을 조성하고 불사를 진행하며 스스로 경전을 강의하였다. 이런 양무제가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에게 평생동안 신앙을 위해 했던 많은 행동들의 가치를 물었다. 달마대사는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으며 글을 배우고 가르치던 그 모든 것에 대해 '공덕이 없다'고 했다. 신앙을 위해 봉사한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오늘날에도 분노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23103014460613.jpg 달마대사 (출처: 조계사)

달마대사는 진실한 공덕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무제는 무엇이 성스러운 진리냐고 물을 때, 달마대사는 진리는 성스러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성스러운 것 조차도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분노인지 체념인지 양무제는 자신 앞에 있는 그대가 누구냐고 반문했다. 이에 달마대사의 한마디는 더 충격적인 울림을 제시한다. "모릅니다."


이름, 직함, 사는 곳, 국가, 생김새 등으로 '나'를 정의할 수 있는가?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있는 것인가?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양무제는 이후에도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지만 그가 세운 나라는 전쟁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아직까지 인류가 말끔히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다. 전쟁은 왜 일어나며, 사람들은 왜 고통 속에 살다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할 수 있다. 일상의 위기가 찾아와 삶의 근본을 생각해야했던 위진남북조시대 대혼란의 시기를 보냈던 민중 개개인의 인생에서 우연찮은 중국과 인도라는 문명의 만남이 이러한 질문을 더욱 짙게 만들어냈다.


이렇게 등장한 소림사는 566년부터 1990년까지 1400년이 넘는 불교의 많은 흔적을 비석이라는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당나라 건국에 기여한 소림사의 승려들, 측천무후나 쿠빌라이칸과 같이 소림사를 지원했던 황실의 지원, 무술의 성지로서 수련의 발전, 천하제일명찰이자 선불교의 본고장으로서 아시아의 많은 승려들의 교류를 남긴 소림사의 비석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소림사에 이어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또 다시 중국은 물론 세계의 기억을 상징하는 자산이 되었다.


960px-Tang_Dynasty_%22Li_Shimin_Stele%22_%2810200671446%29.jpg 728년 세워진 황당숭악소림사비 (출처:위키피디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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