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람캄행 비문 (2003년 등재)

태국의 황금기를 열어간 위대한 군주의 기록

by JS

화폐에는 그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상징적인 인물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 태국의 바트화 지폐에도 태국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들의 초상이 담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역대 왕조의 왕들이 포함되는데, 2012년에 발행된 20바트 지폐에는 수코타이 왕국의 전성기를 연 람캄행 대왕의 좌상이 새겨져 있었다. 좌상 왼편에 새겨져 있는 람캄행 비문은 태국 역사의 시작을 열었던 역사, 문화적 중요성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Thailand_GOV_20_baht_2013.04.01_B181a_P118_6A_9032273_r.jpg 태국 20바트화 (왼편에 람캄행 비문이 있다, 출처: BanknoteNews)

1292년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람캄행 비문은 흡사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사면에 기록된 왕위 계승 과정과 여러 업적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을 보면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람캄행 대왕의 통치 시기(1279-1298)는 태국 시민들이 배우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 중 하나이다. 정치 개혁, 정복 전쟁, 불교의 도입, 경제 및 사법 제도의 확립을 통해 수코타이는 물론 태국 역사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람캄행 비문이라는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문이 발견된 경위도 다소 기묘한 이야기가 있다. 1824년 훗날 라마 4세가 되는 짜끄리 왕조의 몽꿋 왕자는 20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궁궐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밖에 나와서 살게 했으며, 그 스스로는 승려가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왕이었던 형 낭끌라오(라마 3세)의 존재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복형제였던 낭끌라오는 형이었지만 후궁 소생이었으며, 몽꿋은 왕비 소생의 적자였지만 동생이었다. 두 형제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몽꿋은 승려로 10년 동안 방콕 외곽에 있는 왓 사모라이(라차티왓)에 머물렀다. 단순히 은둔 생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암은 영국 등 서구 열강과 교류하고 있었다. 몽꿋은 유럽의 선교사들과 소통하기도 했으며, 그 스스로도 영어와 서양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1833년 29세의 나이에 몽꿋은 시암 북부로 순례를 떠났다. 수코타이의 고대 마을들을 다니던 중 직사각형의 사면과 돔 모양의 지붕을 가진 암석을 발견했다. 사면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고대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방콕으로 비석을 가져왔다. 마침내 1855년 이 비문이 현대 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이 람캄행 비문이다.


Ram_Khamhaeng_Inscription%2C_December_2024.jpg 람캄행 비문 (출처: 위키피디아)

사면에는 람캄행 대왕의 통치 아래 수코타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1면에는 그가 셋째 아들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섬겼으며,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워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람캄행이란 말이 용감하고 위대한 왕자라는 뜻이다. 이후 아버지와 형이 죽자 왕위가 자신에게 이어져 있음을 기록하여, 성품으로나 실력으로나 정통성으로나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정당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2면에는 그가 통치자로서 세운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수코타이는 금은, 코끼리, 말 등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자유로운 무역이 시행되었으며, 지배층은 물론 자유민들의 재산이 존재하고 상속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재산권과 소유권 등 경제개념이 제도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도 토지를 마련할 때까지 생산물이 제공되었으며, 소유권을 바탕으로 사유재산이 만들어지고 그 권리가 보호되었다. 또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주요 갈등은 왕의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왕이 재판관으로서 내린 판결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관습과 합리적 가치를 기반으로 왕의 권위를 통해 내려진 결정이 사회의 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면에는 종교의 역할이 나타난다. 람캄행 비문은 당시 상좌부 불교가 왕국의 공식 종교였으며, 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람캄행 대왕은 불교의 수호자로서 그가 스스로 불법을 설파하는 인물로도 묘사된다. 또한 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승려들을 도우며 공덕을 쌓아 사회적 결속을 증진하는 카티나 의식을 비롯한 불교 의례가 거행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당시까지 큰 존재감으로 남아있던 토착 종교의 모습도 보여지고 있다. 프라 카풍이라는 이름의 존재는 산의 신령으로 묘사되어 불교와 함께 토착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프라 카풍에 대한 공양과 존경의 표현이 왕국의 존속과 번영을 약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면에는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로 끝맺는다. 그의 통치시기 수코타이는 오늘날의 라오스, 말레이시아 북부, 미얀마 등으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정사를 논하며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있으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람캄행 비문을 통해 현대 태국어의 기원이 람캄행 대왕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960px-Sukhotai_map.jpg 수코타이의 영토 (출처: 위키피디아)

광개토대왕비를 포함한 세상의 많은 비문이 그러하듯, 람캄행 비문 역시 위조 또는 변조 논란이 존재한다. 일부 언어적 표현이 당대의 그것과 맞지 않다거나, 후대 왕조의 정치적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비문이 발견된 과정에서 설명하였듯, 몽꿋이 아버지와 형 다음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은 람캄행의 즉위 과정과 묘하게 겹쳐서 보이는 것에서도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현재까지는 람캄행 비문에 대한 논란은 그것을 단순히 음모론으로서 잠재우기 보다는 태국 역사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할 것이다.


2003년 람캄행 비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방콕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천 송도에 있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도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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