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뵈러 주말에 친정에 가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갑자기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갑작스럽게 연락 전하게 됐어 ㅜㅜ’
그녀 어머니의 부고 톡이 왔다. 혈액암을 앓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내가 아빠의 암소식을 들은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나의 친구는 어머니의 암소식을 접했다. 곧장 그날 밤에 아이들을 재운 후 친구를 만나러 빈소에 갔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응급상황으로 병실에 계셨기 때문에 밤낮 간호하며 사투를 벌였던 친구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던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 시간의 슬픔을 나누고 있었는데 오히려 친구가 먼저 나를 아빠 일로 힘들 텐데 힘내라면서 격려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해 줬으면 좋겠어?
미치도록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벙어리인가... 마음속으로는 친구를 위로하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내가 던진 말은 “○○아, 내가 너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해 줬으면 좋겠어?”가 튀어나왔다. 친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편안했으면 좋겠어. 편안함을 위해서 기도해 줘..”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까닭은 이 친구의 인생을 미세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도 이미 10년 전쯤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술을 많이 좋아하셨고 어머니와의 부부 사이는 그닥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어머니는 두 딸을 두고 절에 들어가셨다. 친구와 친구 동생은 부모님이 계셨지만 외로운 고아 같은 인생을 살아야 했다.
편안함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친구의 부탁에는 이미 그렇지 못했던 외롭고 고된 삶의 내러티브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슬펐다.
세상의 소음과 상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비구니가 되셨던 친구 어머니께서는 편안함을 누리고 가셨을까?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 앞에서 자신이 섬겼던 신과 마지막 편안한 대화를 하셨을까? 그 편안함을 인간은 노력으로 도달할 수는 있기는 한 걸까?
편안함은 어디에서 올까
나의 아버지는 암투병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편안함을 지키고 계실까?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은 이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편안함을 지키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편안함을 포기했을까?)
조용한 묵상 속에서 당신의 평안을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은 그러한 능력이 되시니 나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없는 편안함을 달라고 조른다. 내가 뭐 거창한 인류 평화의 소원을 비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이정도쯤이면 당신은 할 수 있지 않냐고 따지면서 말이다. 따지다가 지치면 매달린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내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내 친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고 떠드는 세상 속에서 인간이 가장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을 버린 것은 마흔이 넘어서다. 자존심 따위 내려 놓고-원래 있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매달였을 때 그 편안함이 비로소 내 삶에 찾아왔다.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good will toward 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