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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멕켄지 Nov 16. 2022

마흔셋 남편의 공시생 아내로 살아가기

결혼하기 전 남편은 사시랑 경찰간부 시험공부를 혼자서 어려운 형편에 힘들게 했었다. 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입시생 강사생활을 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소속 교육회사의 교무팀장 명찰을 받아 직원으로까지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를 만나 결혼했고 우리는 감사하게 두 돌, 세 돌 아이를 키우며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알게 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경찰 간부 시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원 임용을 준비했던 나는 그 미련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다시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이면에는 남편이 강사생활보다 경찰간부로 직장 생활하는 것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올인해서 해도 쉽지 않은 시험을 일하고 가정생활하며 아이 돌보고 공부까지 하는 건 역시나 녹록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당장의 경제적 궁핍보다 미래의 가치에 투자한다는 나름의 합리적(?) 핑계로 남편의 회사도 관두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래도 부족한 시간은 하고 있던 개인 수업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채워나갔다.


(+)

덕분에(?) 남편과 공동 육아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졌고 연년생 육아가 가능했다. 육아 도움을 지근에서 받을 수 없는 나의 상황에서는 남편이 천군만마 같은 지원군이었다.


(-)

그러나 그만큼의 기회비용도 따르는 법.

대출은 계속 쌓여갔고 정말 하루살이처럼 현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당장 아이들 기저귀, 생필품 사는데 빠져나가는 돈과 잔액이 문자로 보이면 인간이 간사하게도 처음 가졌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불안하고 불편해졌다.




하지만 반전을 주는 드라마는 우리 가정에 없었다.  나이 제한 때문에 시험을 더 이상 칠 수도 없었다. 이제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고 나이 마흔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비정규직 몸 쓰는 일 외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본 자산이 풍족해서 사업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우리 주위에 흔히들 들을 수 있는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 같은 이면에 함께 한 배우자의 인내와 고생들의 이야기.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런 큰 그릇의 배우자가 되어야지 하는 위인전에 나올법한 어쭙잖은 포부를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위인이 못 되는 나는 잔고가 당장 없어 친구들이랑 차 한잔 마실 여유가 생기지 않으면 불편해하고
결혼생활 시작 후 일 년, 이년, 삼 년, 사 년 시험 불합격과 계속되는 공시생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늘 나 자신과의 한계에 부딪히며 살았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남편에게 실망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사람은 그 실망감을 느끼며 현실을 살고 있는 자연인의 아내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길이든 하나님이 가장 쓰시기 좋은 때에 남편을 적재적소에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당장 현금이 없어도 맛있는 것 먹고 아이들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즐겼다. (물론 미리 핫딜 검색하며 표를 예매하고, 기저귀 포인트 쿠폰을 모으며 입장료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생활하긴 했지만) 그랜드 조선호텔은 못 가지만 호텔 안 스타벅스에서 바다 뷰를 보는 유희  아닌 유희를 즐겼고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 아이들 옷은 주위에서 물려받기도 하고 세일을 기다리며 샀지만 지인 아기들 옷 살 때는 백화점에서 내 형편에 맞는 가장 좋은 선물을 하려고 했다.


누군가를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도 순서를 기다리며 대접받으려고 눈치 보는 것보다 우리가 항상 먼저 지갑을 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마음은 이렇게 노력했지만 내 기억만큼 사실은 그렇게 베풀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내가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여유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차 한잔 대접할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만 나의 궁핍한 형편 운운하며 지갑 열기를 더디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한 것은 오히려 내 삶의 여유의 크기를 갉아먹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마흔셋 남편의
공시생 아내로 살았었다.



* 결국 가장 빠르고 현실적으로 도전해 볼 수 있는 건 9급 공무원이었고 그중에서 여태까지 해왔던 공부랑 겹치는 과목이 많고 나이 영향이 가장 덜해서 독립적인 임무역할이 많은 직렬을 택해서 공부했다. 다행히 합격은 했다.


강사생활을 대부분 정리하고 거의 수입이 없어 대출에 의존해 살고 있는 걸 모르는 주위에서는 마흔셋에 이제 초봉 받는 말단 공무원 생활 시작이라 벌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우리 가정 경제상황의 민낯을 봤을 때는 얼토당토 한 말이고 너무나 감사한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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