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by 한가람

"아가"

환승정류장에 앉아서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응? 나?'

낯선 호칭이 어색함에도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어르신이 나를 보고 계셨다.

나를 부르신 것이 맞나 보다.

"네"

"지금 오는 버스 안 타재?"

"네"

"그러면 이거 좀 같이 들어줄래요?"

"아, 네"


어르신은 바퀴가 달린 큰 장바구니를 붙잡고 계셨다.

곧바로 버스가 왔고 장바구니 잡고 오르시려는 어르신을 만류했다. 도움을 요청하셨음에도 자신의 몫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같이 탑승할 것이 아니기에 나 혼자 들어 올리는 것이 더 수월해 먼저 타시기를 권했다.


"먼저 타시면 제가 올려드릴게요."

"아고 미안해서 어쩌나."

고마움, 미안함, 안도감이 어르신의 표정에 떠오르고 있었다.

"뭘요."

웃으면 인사를 드렸고 곧 버스는 문을 닫고 출발했다.


이런 작은 도움을 드리는 일은 별다를 것이 없는데도 그날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왜 그랬던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르신이 보여주셨던 태도 때문이었겠구나 싶었다.


여든 가까이 되어 보이셨는데 허리가 꼿꼿하셨고 음성이나 태도에서 상대를 향한 존중이 묻어났다.

또한 안정과 여유가 느껴졌다.


어르신이 나지막이 부르시던 "아가"라는 호칭도 참 정겹게 들렸었다. 사실 이제 내가 누군가를 "아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그렇게 불리는 순간에 마치 이쁨 받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이 마음에 따스함이 번져갔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웃음이 났다. 어른인 척하고 살아도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아이가 내 속에 여전히 있나 보다. 아마 나이가 더 든다고 해도 이런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가끔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의도치 않은 순간들이 일상에 맛을 더해준다.


누군가를 도왔는데 오히려 내가 더 즐거위 지는 날이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 참 쉽지 않다. 어느 정도 안면을 틔우고 나면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같이 가족 간의 호칭을 확대시켜 사용하거나 직함을 호칭으로 부르거나 하는데 낯선 타인을 부를 때는 정말 애매하다.

저기요, 어르신, 학생, 사장님, 사모님, 선생님 등등 사회적 신분이 호칭이 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적당히 대체할만한 표현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전까지는 약간의 어색함을 감수하면서 타인을 부를 수밖에 없나 보다. 그런데 이번 경험을 통해서 단순히 호칭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를 부르는 순간의 마음상태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상대를 향한 따스한 마음이 담겨있다면 듣는 이도 편안히 마음이 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어휘를 선택하느냐도 중요하겠으나 그 어휘를 입밖에 내놓는 내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말에 정서가 담기면 말투가 되니까. 우리가 말투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내 말에 어떤 정서가 실려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무척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직한 태도와 말투를 형성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여 봐야겠다.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넉넉하고 품격 있는 어르신의 모습에 가까워지겠지.

커피 한 스푼만큼의 변화도 매일 쌓이다 보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되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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