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점점 더워지고는 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찬기운이 느껴지는 5월 중순경 어느 아침이었다. 충분히 따뜻하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기온 12도를 대응하기에는부족했나보다.
정류장에 서있으니 살짝 찬기운이 몸을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요 며칠 목상태가 안 좋아서 조심하고 있는데 감기걱정이 되었다. 다시 집에 들어갔다 올 시간은 안되고 버스가 빨리 오기를 바라며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괜찮겠지.'
버스가 도착하고 안에 들어가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다.' 포근함에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편안히 좌석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계속 찬바람이 들어왔다. 설마 벌써 에어컨을 키신 건가 싶어서 에어컨 송풍구 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는데 아니었다.
'이 찬바람은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고개를 빼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앞자리 창문이 열려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좋은 듯 앞자리 승객은 창문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버스가 서면 적당한 온도가 버스가 달리면 춥게 느껴졌다.
'어쩔까..... 추우니 문을 닫아달라고 해볼까?' 그러기에는 또 그렇게 춥다고까지 할 기온은 아닌 것도 같고 저분도 필요에 의해서 창문을 열고 있는 것일 텐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고 애매한 느낌에 결정을 못 내리고 그 상태로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 상태로 10여분 정도 가니까 정수리가 살짝 얼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부탁을 드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르려 할 때 그 승객이 창문을 닫았다.
'아, 다행이다.'
찬바람을 안 맞아도 되어서, 애매한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안해졌다.
'저분도 충분히 바람이 쐬셨나 보다. 이제 이대로 가면 되겠지.'
맘 놓고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시 뒤 또다시 서늘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새 그 승객이 창문을 또 열고 있었다.
'아이고 정말 멀미라도 나나 보네.'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는 이미 좌석이 다 찬 상황이라 그냥 그대로 버텨야 했다. 아까 좌석이남아 있을 때 그냥 자리를 옮길걸 괜히 버텼다는 생각과 함께 뭐 어쩌겠어. 여러 사람이 이용하고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해야지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내가 내릴 때까지 그렇게 내 앞자리의 창문은 열렸다 닫혔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덕분에 그날 아침은 잠이 확 달아났다.
창문을 닫아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을 왜 망설였던 것일까? 내가 견디고 있는 총량보다 그 승객이 견디고 있는 총량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 공황장애를 호소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그분들이 연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얼얼한 것이 견딜만했을 수도 있다. 창문을 열고 닫고 반복하던 그 승객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창문을 계속 열어두는 것이 다른 승객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계속 열고 갔을 테니 말이다. 그분 나름 노력하고 있었던 걸 수도 있겠지.
예전에 한 버스기사님이 푸념처럼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름에 에어컨을 켜면 시원하게 해 달라 더 세게 틀어달라 하시는 분들이 있고 너무 춥다고 조금 줄여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보니 승객들의 요청에 따라 운행하는 내내 에어컨 강도를 올렸다 내렸다 해야 한다고 말이다.
알다시피 대중교통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시스템이다. 그 말은 각자에게 맞춤으로 환경이 제공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적정온도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니 누군가에게는 쾌적한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용하는 것이 대중교통이라는 말도 되겠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수용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 편리함'을 경험한 몸은 '더 불편한'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대중교통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많은 환경들에서 조금의 불편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종종 보인다.
다 같이 나누면 개개인에게는 적은 부담만 갈 수 있는 것을 한쪽으로 모두 몰아서 상대가 책임지게 만들면 그 한쪽에게 너무 큰 부담이 가게 된다. 그리고 그 한쪽은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다.
부담을 짊어지기보다는 기왕이면 배려받고 싶을 것이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베풀라는 오래된 격언을 불러오지 않아도 때로는 눈앞의 작은 손해가 더 큰 도움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시야를 넓히면 나와 너는 우리로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