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몸을 버스에 싣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가던 중에 하차벨 소리에 반응하며 출입문 쪽으로 시선이 갔다. 무심코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내리려고 서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와, 정말 길다. 어떻게 저 길이까지 길렀지?'
그렇게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을 최근에 본 일이 드물다 보니 시선이 계속 머물렀다.
진주장식이 박힌 머리띠와 찰랑거리는 금색 귀걸이 무심한 듯 하나로 묶은 머리는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만들며 검은색 정장과 잘 어울렸다.
'저 긴 머리를 어떻게 관리하는 걸까?'
잘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머리에도 정성을 쏟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긴 머리를 감고, 말리고, 머릿결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노력이 그려졌다.
짧은 머리가 주는 편안함을 알아버린 지금은 그런 노력을 들일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초등학교시절 나도 허리아래까지 가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길러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지, 동네 미용실을 갈 형편이 아니어서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긴 머리를 잘 간수하고 다녔던 기억은 있다. 겨울이면 마당에서 데운 물에 머리를 감고 말렸다. 날이 춥다 보니 그사이에 머리카락 사이사이 살얼음이 끼는 날도 있었다. 추웠던 것보다 머리카락에 살얼음이 낀 것이 신기해서 가족들에게 보여주며 같이 웃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머리가 그 정도로 길면 감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우선 머리를 세등분 정도로 나누고 끝에서부터 적당량 샴푸로 비벼주고 그다음 구역에 샴푸로 비벼주고 마지막에 두피와 연결된 부분까지 샴푸로 비벼주어야 한다. 헹굴 때도 마찬가지다. 대야가 머리카락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바가지로 물을 퍼서 한두 번 씻어낸다음 대야에 반만 담가서 거품을 씻어내고 나서 씻은 부분은 건져서 걸쳐두고 나머지 부분과 머리를 대야에 담가서 헹궈냈다. 마지만에 물 두어 바가지로 부어주면 끝이다.
말리는 것도 단계가 있다. 빨래를 짜듯 긴 머리를 짜서 물기를 덜어내고 수건을 두 개 사용해서 꾹꾹 누르기도 하고 수건을 팽팽하게 당겨서 아래서부터 머리를 쳐서 물기를 털어낸다. 그런 뒤는 자연 건조에 맡겼다. 그 시절 드라이기는 없었으니까.
이제는 단정히 머리를 묶을 차례였다. 대충 말린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서 올려 묶고는 한 갈래로 땋기도 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서 땋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덜 말린 머리를 묶는다는 게 꺼림칙하지만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그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는 것이 더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약간 젖어있을 때 머리를 묶거나 땋기가 더 수월했다. 언제부터 스스로 머리를 묶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등 고학년 때 머리를 이리저리 땋으면서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던걸 보면 아마도 저학년 때부터 스스로 머리를 만지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스타일로 땋기를 시도하고 그게 잘되었을 때 만족스러워했었다. 머리를 혼자서 잘 간수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나 보다.
그렇게 길었던 머리를 중학교 입학 후 미련 없이 단발로 잘랐던 것을 보면 애착이 컸던 건 아니었나 보다. 그냥 나를 상대로 인형놀이를 했던 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중학교 입학식날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중에 머리가 너무 길면 거기에 신경 쓰느라 학습에 방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아마 어린 나는 교장선생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니까 당연히 잘라야 하나 보다 생각했던 것 같다. 오히려 친구들이 더 아쉬워했으니까.
단발로 자른 순간 낯설기도 했지만 그 가벼움이 좋았던 것 같다. 생각보다 머리카락의 무게가 컸었다. 머리를 감고 말릴 때도 좋았다. 길었던 때에 비하면 짧아진 머리를 말리는 것은 정말 간편했다. 가볍고 편리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가장 긴 머리는 어깨를 덮는 정도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꽤 오랫동안 커트머리로 있었다. 아기를 업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아기들은 눈앞에 있는 걸 붙잡는데 한 번씩 묶어놓은 머리를 잡아당기면 정말 아프다. 아기들은 그냥 노는 것인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눈물이 난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고서는 어깨를 덮는 길이로 했다가 짧게 깎기도 했다가 그때그때 변화를 주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 긴 머리는 다시 할 자신이 없다.
그 무거움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머리를 말리느라 긴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다. 찰랑찰랑 분위기 있는 긴 머리가 이제는 내게 의미가 없어졌나 보다. 짧은 머리가 편하고 마음에 든다. 손질하기도 편하고 감고 말리는 시간도 절약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는 멋스러움보다 편리함이 더 좋은 나이기 되었다. 그게 아쉽다거나 그립다거나 그런 마음은 아니다. 긴 머리의 멋진 그분을 보면서 잠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유사한 경험을 해보았고 다른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내게 더 적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모습은 그분다워서 좋고 내 모습은 나다워서 좋다. 나른한 아침 옛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 수 있었던 것도 좋다.
순간을 붙잡는다는 것에 이런 점이 있다.
여러분은 어렸을 적 헤어스타일이 어떠셨는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혹은 혼자 어떻게 그 머리를 간수하셨는지 한번 추억여행을 떠나보시길 권해본다.
아마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두 개는 생각나실 것 같다.
오늘도 기억 저장소에서 추억이라는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