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by 한가람

무사히 일을 다 끝내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잘 맞아떨어진 것에 감사하며 오늘은 일찍 귀가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오후에 그친다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빗줄기가 약해져서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낮동안 생각보다 많은 비가 내렸는지 뉴스에서는 백여 년 만에 내린 폭우라고 떠들썩했다.


하지만 시가지는 교통이 원활했다. 차들도 잘 다니고 거리에 사람들도 많이 다니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왔다곤 하지만 도심에서는 별일이 없어 보였다.

순조롭게 운행되는 버스에 올라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시가지를 잘 달리던 버스는 터널에 진입하자 거의 서있는 상태였다.

비가 오니 역시 차가 막히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2km를 조금 넘는 터널을 통과하는데 30분 가까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터널을 통과하자 버스는 다시 속력을 올렸고

환승하는 곳까지 평상시처럼 운행이 되었다.

문제는 환승정류장에서 발생했다.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은 켜져 있었는데 버스는 한대도 뜨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상황이 낯설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버스 운행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전광판에 버스가 뜨지 않는다는 건 운행 중인 버스가 한 대도 없다는 의미다.

'이럴 수가 있나?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운행하는 버스가 한 대도 없는 거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던 분들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가 물에 잠겼다더라, 여기까지 아침에 출발해서 걸어왔다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상황파악이 필요했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물어보니 크고 작은 개천들이 범람했고 자신은 아침 출근길에도 자동차전용도로 진입로가 통제되어서 농로로 힘들게 출근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하는 소식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작은 개천이 있는데 거기가 범람했다는 것이다. 근처가 모두 침수되었고 다리도 잠겨서 버스들이 운행을 못하고 있나보다였다.

다리를 지나지 않고 돌아오는 버스 노선이 딱 하나 있는데 그 노선의 버스도 이곳까지는 운행을 못하는지 1시간 남았다고 떴다가 다시 1시간 반이 남았다고 떴다. 출발점에서 버스를 보내도 될지 말지 고려 중인 듯했다. 버스가 언제 운행이 재개될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은 자기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SUV면 모를까 승용차는 차체가 낮아서 도로상황을 모르니 쉽사리 그러자는 말이 안 나왔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성인인 딸과 나오신 한분은 가족과 여러 번 통화 끝에 데리러 오기로 하셨는지 정류장을 떠나셨다.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은 볼일 보고 나왔다가 집엘 가야 하는데 기약 없는 버스만 기다리고 있자니 속이 타시는 듯했고 문화센터에 수업이 있어서 아침에 집에서 출발해서 거기까지 걸어오셨다는 분도 있으셨다. 담당자와 통화하는 목소리에는 고단함과 난감함, 답답함이 실려있었다.

비가 좀 많이 왔을 뿐인데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는 혼돈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해지는 저녁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도로를 건설하고 훌륭한 교통통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도 규격 외의 일이 벌어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지.

정 안되면 이곳 어디엔가 숙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길 건너 택시정류장에는 늘 서너 대의 택시가 길게 줄지어 서있었는데 그날은 한 대도 없었다. 아마도 도로 상황을 공유하며 운행이 어렵다는 판단아래 다들 휴무에 들어가신 모양이었다. 길에 지나가는 택시도 안보였다. 콜을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정말로 숙소를 잡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택시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잡긴 했는데 택시등도 꺼져있고 도로 상황이 안 좋아서 안 간다고 하실지도 몰랐다. 잠시 긴장되는 순간, 어디 갈 거냐고 기사님이 물으셨고 행선지를 말하니 마침 본인 집 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탑승해도 된다고 하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타서 가는 길에 도로 상황이 어떤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낮부터 수시로 곳곳에서 통제가 이루어졌었고 고속도로도 한동안 통제를 했었다고 한다.

동료 택시 기사 한분도 굴다리 밑을 지나가다 침수가 되어 본인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셨다고 했다.

원래는 오후 5시에 일을 끝냈어야 하는데 의무콜이 들어와서 할 수 없이 이쪽으로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퇴근할 때는 환했는데 벌써 한밤중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기사님께 감사의 말을 한번 더 전하고 집에 들어왔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니 생각보다 비피해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든 체계는 일반적인 통계에 근거한 것일 뿐 초거대 태풍이 불거나 강진이 발생하거나 폭우가 며칠씩 쏟아지거나 하는 상황이 되면 전혀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평범한 하루하루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온정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여겨지는 일상이 사실은 특별함이라는 것을 몇 년 전 전염병사태 때도 경험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침에 평온한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것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일을 하러 나갈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도로와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갈 곳이 있는 것도, 이런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안녕이고 평안이고 행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족들 모두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정류장에 계셨던 분들도 모두 무사히 귀가하셨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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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다음날 아침 출근길 정류장 지인께 물었다. 어젯밤에 어떻게 귀가하셨냐고.

다리로도 물이 차올라서 경찰들이 막고 있어서 못 지나가게 했는데 경찰이 다른 곳으로 간 틈에 몇 분이 모여서 다리를 넘어 차오르는 물을 헤치고 건너오셨다고 했다.

위험하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집에는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고 여럿이어서 괜찮았다고 하셨다.


어렸을 때 비만 오면 잠기는 동네에 살던 친구의 친구가 생각났다. 그에게는 비가 오면 집에 물이 차오르고 넘치는 빗물을 건너 학교로 가는 것이 익숙했었다. 그럴 때마다 늘 주위에서 몰려와 빗물에 잠긴 집에서 물을 퍼내고 가재도구들을 건져 올리곤 했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그 상황이 고단하고 못 견디게 싫었을 터이다. 하지만 묵묵히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테니 그저 견디고 견디면서 단단해졌을 것이다.


거세게 넘쳐 오르는 강물을 보면서 건너야겠다는 생각을 나는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어느 사이엔가 도시의 편리한 삶의 방식에 익숙해졌나 보다.

비 오면 비 새는 천장밑에 대야를 받쳐놓고 태풍이 불면 마당 빨랫줄이며 장대를 치우고 한겨울 얇은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견디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

위기상황에서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드러난다. 슬기롭게 그 상황을 넘길 수 있는 것은 앎이 가지고 있는 힘일 것이다. 나는 앎을 가지고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날씨가 변덕이 심해진다. 어쩌면 그 시절처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해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날씨는 늘 자기뜻대로 움직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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