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희미한 기억 속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 거기에 뭔가를 끓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무엇을 만드시고 있던 건 모르겠다.
하지만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타는 장작소리와 함께 맛있는 김이 솔솔 나던 장면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 뒤 연탄불로 아궁이는 바뀌었고 그 뒤는 곤로로 바뀌어서 장작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게 된 건 시간이 흐른 뒤 중학생 때였다.
합숙연습으로 여름방학 2주간 한적한 시골중학교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합숙하면서 연습하는 우리를 위해 세끼 밥을 해주시던 분이 있으셨는데
나는 장작불이 좋아 옆에 붙어서 불구경을 했던 것 같다.
성가셨을 수도 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의 불구경을 허락해 주셨다.
불이 약한 듯해서 장작을 더 넣으려던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계속 불을 세게 하면 밥이 빨리 되는 것이 아니라 탄다고 불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천천히 익어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다른 기억은 흐릿한데 그 순간은 남아있다.
'아! 많이 쏟아붓는다고 빨리 되는 것은 아니구나.'
아프다는 것은 꽤나 불편하고 성가시고 힘든 일이다.
며칠 안에 회복이 되지 않고 길게 이어질 경우는 더 그렇다.
처음엔 아픈 상황이 원망스럽고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치료를 못하는 의료진이 원망스럽고
나중엔 이런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것 같다.
빨리 나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내 몸이 미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방하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러지 말걸, 그때 할걸. 의미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후회의 그물에 갇히고
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기 비난과 반추로 더 함몰된다.
아픈 몸을 잘 추스르려면 잘 돌봐야 하고 그러려면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은 필수다.
머리로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어쩌면 마음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라서 몸이 나아가는 속도를 맞추지 못해서 생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과거 잘 기능하던 몸을 기억하고 있으니 현재 잘 따라주지 않는 몸이 낯설고 어색하다.
전보다 잘 기능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불어 계속 이렇게 잘 기능하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해진다.
남의 일이라면 여유를 가지라고
그렇게 조급하면 나을 것도 안 낫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내 일이 되면 조급하게 뛰어다니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마음은 한계가 없어서 얼마든지 속도를 빨리도 느리게도 할 수 있지만 몸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어서 낫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마음의 속도를 몸의 속도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서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저 몸이 잘 회복될 수 있도록 마음이 몸에게 협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
괜찮아져서 원래의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느리지만 제대로 옳은 방향으로 나가면
결국은 예전의 건강한 몸과 마음을 되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속도가 있다. 타고나는 것인지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각자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존재하고 그 속도에 맞추어서 살아갈 때 무리가 생기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내 속도에 맞춰서 살아야지 마음을 먹다가도
주위에 빠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게 아닌가 싶어 진다.
젊은 나이에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경제적 여유를 획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가 있다.
대단하다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그동안 나는 뭐 했나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딱히 게으르게 살지도 불성실하게 살지도 않았건만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고
어느 세월에 원하는 것을 이루나라는 생각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자신만의 속도로 산다는 것이 힘들어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뭔가를 더 하려고 한다.
마음에 몸에 가해지는 압력은 무시된다.
그저 빠른 시일 내에 성공을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들로 전력질주한다.
성공의 요소에 개인의 노력만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변상황도 중요하고 시기도 중요하고 개인적 요소들도 중요하다.
과로가 당연하고 100%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인식 속에서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조급함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를 일상처럼 내다가
탈진해 버리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내고 있었음에도 후회와 자기 비난 속에서 힘들어한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애초에 열심히 노력한 이유가 잘 살고 싶어서 행복을 위해서였다면,
자신을 깎아내어 가면서 그렇게 애써왔는데도 괴롭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가고 있던 방향이 과연 자신이 원하던 것이 맞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의 영향력이 거대해지고 연일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요즘이다.
건강식품 한두 개쯤은 당연히 먹어야 할 거 같고
피부관리, 노화방지에 당연히 신경 써야 할 거 같고
해외여행도 당연히 가야 할 거 같고 문화생활도 당연히 누려야 할 것 같다.
다이어트든 식이요법이든 헬스든 당연히
몸도 관리해야 할 거 같고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코인이든 재테크는 당연히 해야 하고 부를 이뤄야 할 것 같다.
하고 있는 일에서도 당연히 인정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나의 욕망인지 주입된 욕망인지 살펴볼 겨를은 없는 듯하다.
그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과제만 놓여있다.
그리고 그 과제를 빠른 속도로 해내기 위해 달려갈 뿐이다.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부하가 걸리고 있는지는 모른 채 말이다.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성공과 너의 성공이 다를 수 있고 그 다름에 대해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모두가 최고가 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한 성공이 더 우월하다고 타인의 성공을 깎아내리지 말자는 이야기다.
사람은 다 다른데 한 가지 기준으로 줄 세워서 평가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와 달라서 어색하고 낯설고 이상하게 여겨지더라도
틀렸어!라고 바로 말하기 전에
최소한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 주어진 삶을 살아낼 애쓰고 있음을
알아주는 여유를 가져보자는 이야기다.
비교란 결국 상대적인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