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애쓰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사고 피해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강압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가 속한 그룹이 아니고 나와 연관성이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절실한 마음이 가벼운 가십거리로 다루어지거나 더 나아가서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생각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출신지가 다르고 학벌이 다르고 성별이 달라서, 처한 상황이 달라서, 생활의 경험이 달라서 공감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강한 감정을 터뜨리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다름은 때로 거북함을 가져온다.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한마디로 불편하다. 그래서 접근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싶어 질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왜 가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색다른 경험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확장시키고 성장시키는지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와는 다른 가치, 목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우리는 더 넓은 시야와 유연한 사고, 현명한 대처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다.
자신과 똑같은 이들과만 교류하고 그 속에 안주하며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좁아지겠는가? 원시부족사회의 고립된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무리로 분류하고 규정짓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기에 꽤 편리한 방식이다. 지각되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듯한 느낌을 주니까 편리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 맹점이 있다는 것을 늘 지각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 삶의 모습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분류되기보다 애매하고 모호한 상황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이 고르지 못하고 인간이 완전하지 않기에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허물을 보고, 어쩌면 사소한 시도가 생각지도 못한 큰 반향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짧은 한순간, 작은 친절, 혹시나 하는 마음 정도는 내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집합체는 견고한 상호성 위에 존재한다.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다면 남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남이 어려울 때 내밀어준 손이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붙잡아주는 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이 퍼져나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들로 촘촘히 연결된 안전망 속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외면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