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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Jul 23. 2024

안온한 관찰자

7. 유명과 무명, 그리고 북토크

 북토크 또는 강연을 위해 찾아오시는 작가들이 계신다. 작가를 모시고 행사를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북카페의 숙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서울에서 먼 지방은 이를 꾸준히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강연료. 책을 파는 곳이 으레 그렇듯이 수익이 좋지 않다. 고정비를 지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빠듯한데, 공간이 협소하면 참여인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참가비로 강연료를 충당하기도 힘들다. 동네 책방이 대체로 규모가 영세한 것을 고려하면 제안할 수 있는 강연료의 상한선이 낮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는 모객의 문제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유명한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할애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북카페에서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유난히 자주 언급되는 작가들이 있다. 유행을 타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가 재밌게 책 소개를 하면 그 책을 돌려 읽으면서 언급되는 횟수가 증가한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나 한 명의 작가에 매료되면, 나는 그 작가에게 강연 요청 이메일을 보낸다. 내 성향상 구구절절 긴 글을 적어 감정에 호소하는 걸 잘하지 못해 간결하면서도 만남이 성사되길 바라는 간절함을 싣는다. 예상 모객 수와 최대로 지급할 수 있는 강연료를 입력하고, 날짜도 최대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성사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기에 두세 명의 작가에게 요청을 보내고 나면, 답변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작가에게 더 요청하진 않는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보낸 제안서가 모두 통과될 경우 어떻게 일정을 조율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질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런 적은 없다. 창원은 서울과 교통편이 잘 이어져 있음에도 거의 하루를 온전히 소모해야 하는 지역인지라 거절의 답변이 줄을 이어 돌아온다. 아주 정중하게, 납득 가능한 이유를 들어 돌아온 거절 메일을 받는 순간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로 그 이유 때문에 못 오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복사한 듯 똑같은 답변들을 보고 있을 때면 이 답변이 작가들 사이에서 제안 거절의 몇 가지 선택지 중 하나라는 걸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있다. 무명작가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어 하지만 자리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흔쾌히 초청에 응하는 작가와는 달리 참여하겠다는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행사로 인해 독자들도 많이 오면 돈 많이 벌지 않느냐고. 행사 입장료를 얼마씩 받고 거기에 음료도 팔고 책도 팔면 수익이 좋지 않냐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남는 게 없기라도 하면 다행인 수준이다. 대개의 행사는 손실을 껴앉고 진행된다. 애초에 여기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인 30여 명의 입장료로 작가의 강연료를 맞춘다는 건 불가능하다. 거기다 행사는 대개 주말에 있고, 주말은 일주일 중 매출이 어느 정도 보장된 날이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진행하는 만큼 손실은 필연적인데, 단순한 계산으로 마치 책방이 큰 이익을 취하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작가들은 북토크 도중에도 동네 책방이나 북카페의 필요성과 독자들의 애정이 상생의 길이라고 언급해 주지만 그 효과는 피곤할 때 마시는 피로회복제보다 옅고 짧다.

 나는 이런 행사들이 북카페와 독자를 이어주는 어떤 따스한 연결고리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독자들 또한 그러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의 행사를 거치면서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장소를 평소에 애용하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책을 취급하는 가게의 존폐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체리피커처럼 자신이 원하는 행사가 열리면 그 행사만 참석하고 다시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일 년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인기 있는 작가를 모셔오려 하고, 또 무명작가에겐 자신의 독자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이유를, 이제는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지방에서 만나기 힘든 작가와 독자와의 연결이라는 초창기 목표 의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모든 행위에 이유를 붙일 수 없듯이,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이제는 개인의 이유의 영역이 아니라 북카페 그 자체가 내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북토크라는 형식으로 주입하는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애정 없이 언제까지고 혼자 불탈 수는 없다. 장작이 더 들어오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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