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근주 Nov 02. 2024

안온한 관찰자

12. 숨겨진 책 관찰 - 일주일(6)

최진영 작가의 <일주일>이라는 소설을 읽고 쓴 내용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한결같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은'. 요즘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요즘 애들은 이라고 운을 띄우며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 애들은 과거처럼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어른스러워야 하는가.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시대는 아주 정직하게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똑같이 흐른다. 시대가 변하면 변화한 것에 맞춰 적응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이 청소년과 청년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필연적으로 겪었거나 겪는 과정에 있다. '나는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쳐 점프하듯 중년에 접어들었어'라는 사람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도 우리 다음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의 자살과 각종 위험에 내던져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자살을 접할 때마다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손을 내밀 곳이 없었으면 그랬을까.'라고. 대신 그들의 탓으로 돌린다. 특히 부족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라거나,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한 이의 자살은 이들의 죽음을 더욱 이해하지 못해 한다.

 부모가 직장도 번듯한데, 공부며 하고 싶은 것 다 시켜주는데,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게 해 주는데, 공부도 잘하고 어른들 말도 잘 듣던 아이였는데, 착했는데. 모든 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외적 요소들 뿐이다. 어느 누구도 피해자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실은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지 않았어'라든지, '나는 이것을 더 배우고 싶었어'라든지,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라든지.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받을 곳을 잃은 자들은 죽음을 택한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죽음이 얹히고 나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후회한다. 살아있을 때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줬어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근원적 바람이 '건강은 기본이고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남부럽지 않은 곳에 취직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라.'로 점차 변질된다. 죽음 외에 틀어막은 손을 치울 방법이 여전히 부족하다.

 하루 평균 2.7명의 청소년이 자살을 한다. 청소년 5명 중 1명 꼴로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여전히 귀를 막은 채 "요즘 이렇게 살기 좋은데 뭐가 불만이냐"고만 떠든다. 세상이 살기 좋아진다는 것이 '나'가 살기 좋아진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정점으로 부딪히는 곳이 바로 일터다. '요즘 애들은'의 극한을 볼 수 있는 곳.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던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한다던가(자기 밖에 모른다던가), 희생정신이 부족하다던가.

 같은 보상이라면 내게 주어진 몫만 하고 그 몫이 쉬운 쪽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나이가 적고 많고의 문제가 아니다. 본인들이 젊었을 때 그런 상황을 겪었다고 해서 지금의 청년들이 그것을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과거의 희생을 자랑스레 여기고 다음 세대에 강요한다. 그리고 '요즘 애들은'의 마무리로 '살기 좋으니까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을 붙임으로써 화룡점정을 찍어준다.

 세상 자체는 말 그대로 살기 좋아졌다. 과거에 비하면 아주 많은 편리해졌고, 아주 많이 효율적으로 바뀌었다. 아주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것과 사람이 살기 좋아진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행복지수만 봐도 시대가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 시간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을 행복은 아주 꾸준히 역행하고 있다.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긴 덕분에 세상은 살만해졌다. 이제는 '돈'이 아닌 '사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세상이 와야 한다.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더 이상 죽음이 얹힌 메시지로만 떠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안온한 관찰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