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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Jul 06. 2024

안온한 관찰자

4. 숨겨진 책 관찰(2) -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바깥에 서서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구름을 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바쁘다고 재촉하는 발걸음. 넘어지지 않기 위해, 혹은 하루의 고단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사람들 속에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날씨의 좋고 나쁨을 언제부턴가 일기예보와 막연히 본 바깥을 통해서만 판단했다. 하늘을 볼 땐 갑자기 밀려온 먹구름에 해가 가려질 때 정도였다.

 이날 나는 하늘을 볼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물건을 사러 가는 길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던 것이 전부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미세먼지 수치도 좋은 하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색' 그 자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청명한 하늘을 보고 "날씨 좋네"라고 한 마디 툭 내뱉고 말았겠지만, 구름이 없는 하늘을 본 순간 나는 그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구름 하나 없는 단조로운 하늘만 올려 봐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도 지루해질 것이다'라는 구름감상협회 선언문을 뇌리에 박아놓은 책, 바로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다.

 구름이 없다는 이유로 하늘이 단조롭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청명한 하늘이든, 미세먼지로 흐릿한 하늘이든 구름이 없는 하늘은 상당히 밋밋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넘어갔을 일이었다. 특별한 날씨 변화를 일으키는 구름이 아닌 이상 구름은 내 일상을 침범하지 않았고, 나 또한 구름의 존재 유무에 관심이 없었다. 구름이란 대개 몇 가지 대표적인 형태가 있고 그 형태 중 하나를 본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제 나름대로 높다고 솟아있는 6층 빌딩과 빌라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이 없다는 게 이토록 단조로운 일이었나. 단색으로 칠해진 하늘에 상상의 뭉게구름을 그려 넣어본다. 비로소 내가 아는 하늘의 이미지와 들어맞는다. 나는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분명 어렸을 적엔 하늘을 자주 봤었다. 의식적으로 하늘을 봤다기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놀 거리가 없어서 그랬다. 외할머니 집은 외진 주택가의 2층에 위치했는데 옥상을 같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옥상에는 주택가로 이사할 때 들고 온 침대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가끔 놀러 오는 손주들을 위해선지, 둘 곳이 없어 뒀던 곳이 그곳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 매트리스는 내 기억 속에서 그냥 거기에 늘 놓여있는 물건이었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은 두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정도로 넓었지만 중간쯤부터 난간이 없다는 게 최대 단점이었다. 난간이 없는 계단. 난간이 없는 계단에 서서 아래를 볼 때마다 주택과 주택 사이의 건조하고 메마른 틈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이 밀려들어온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면 사방이 탁 트인다. 고작 2층 높이의 주택인데 시야를 가릴만한 높은 건물은 주변에 없었다. 고층 빌딩은 손을 뻗어 엄지를 세우면 시야에서 가려질 만큼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옥상의 구조는 빗물이 내려가기 위함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였다.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절반은 평평한 평지였고, 나머지 절반은 무릎 정도 높이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원래 높이로 내려가는 경사진 바닥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평한 곳의 난간은 어릴 적 내 무릎보다 조금 높았고, 경사진 곳의 난간은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침대 매트리스는 그 경사진 곳의 모서리에 놓여 있었다. 난간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서 매트리스에서 구르다 떨어져도 바닥으로 곧바로 추락하진 않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여전히 아찔한 장소였음은 분명했다.

 옥상엔 주로 여름 방학 때, 저녁을 먹고 나서 올라갔다. 7월 중순의 여름은 저녁 식사를 먹고 나서도 여전히 환했다. 나는 내 얼굴만 한 손전등 하나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손전등이 바람에 굴러가버릴까 봐 옥상 모서리에 야무지게 세워놓고 돌까지 괸 뒤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매트리스에 누웠다.

 초저녁의 하늘은 대낮의 하늘과는 사뭇 달랐다. 낮의 하늘색은 에너지와 활기가 가득한 색이라면, 초저녁의 하늘색은 분명 밝은데 어딘가 슬픔이 베여 있었다. 머리 위로는 여전히 하늘색인데 저쪽 빌딩이 보이는 곳으로는 주황빛이 퍼지고, 반대쪽으로는 밤의 농도가 짙어졌다. 나는 그 중간에서,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는 게 좋았다. 어느 날은 하얀 뭉게구름을, 어느 날은 멋들어지게 얕게 펼쳐진 구름을, 어느 날은 같은 뭉게구름인데 바닥이 먹색인 구름을 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구름이 없어 단조로웠던 하늘의 이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구름은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갔다. 어떤 구름은 부서지듯이 퍼지기도 했고, 어떤 구름은 형태를 오래 유지하면서 더는 볼 수 없는 곳까지 밀려나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왜 구름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솔직히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움직이는 구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는 기억만 편린처럼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문득 이때의 행복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싶어서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봤다. 여름날의 저녁 6시 19분의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양떼구름 모양의 고적운이 저 멀리 펼쳐져 있다. 저 구름을 '고적운'이라고 지칭하는 순간 나는 '그 시절 구름을 보며 느꼈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완전히 받아들였다.




 지금의 나는 파란 하늘이 빛의 파장과 그에 따른 산란으로 보이는 것임을 안다. 과학이 하늘의 신비와 경이를 벗겨냈지만 하늘은 여전히 바라보는 이에게 마음의 치유를 선사한다. 다행히도, 우리의 유전자는 아주 오랜 시간 인류의 조상들이 하늘을 보며 느꼈던 감정까지 과학에게 자리를 내놓진 않았다. 나는 이 감정이 앞으로도 이성(理性)에게 자리를 내놓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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