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희 May 27. 2023

외상값

지하상가 핸드폰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었다. 20대 초, 중반쯤 되었었고 지지리 돈이 없던 때였다. 명색이 성인인데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고, 한 달에 한번 받는 아르바이트비는 일주일이면 사라져 버리는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핸드폰가게 옆에는 조그만 화장품가게가 있었는데 립스틱이나 기름종이를 사러 자주 가다 보니 단골이 되었다. 사장님이 서글서글해서 사야 할 물건이 없어도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수다도 떨고 신상품 구경도 하러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잘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품가게에 염색약을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극장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포스터 속 여주인공이 염색을 결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조용한 가족'. 누군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섬뜩하기까지 한 고호경의 매력에 빛을 더해주는 흑발을 보는 순간 매료되어 이것저것 따질틈도 없었다. 주머니에는 5000원 정도가 있었고 그 돈이면 염색약정도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화장품가게의 문을 밀자마자 급하게 용건부터 얘기했다.

"사장님, 검은색 염색약 하나만 주세요."

늘 그렇듯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고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손톱을 갈아대며 후후 불고 있던 사장님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염색하게?"

이번엔 바지에 흩뿌려진 가루를 떨어내며 손짓을 섞었다.

"이리 와봐."

"?"

점심시간에 짬을 낸 거라 맘이 급한 나머지 빠른 걸음으로 사장님 앞으로 다가갔다.

"뒤돌아봐."

내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두 손으로 움켜쥐어보던 사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언니 머리는 하나로는 안돼.  통은 있어야겠어. 아니다, 두 통이 뭐야.  통은 있어야 하겠는걸. 

줄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지폐 한 장이 만져졌다.

"저...... 근데 제가 5000원밖에 안 가지고 와서......"

돈이 없다말하기엔 모양이 빠지는 것 같아 그나마 집에는 돈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보탰다.

" 나머지는 내일 갖다 주면 되지."

"얼만데요?"

"한 통에 5000원이니까 만원만 갖다 주면 돼."

오늘 없는 만원이 하루사이에 만들어질 리 없었는데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렇다고 다음에 사겠다고 그냥 나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 와서 염색을 하다 보니 사장님 말대로 한통으론 어림도 없었다. 세 통을 머리에 바르고 나니 화장실 세면대며 바닥은 온통 거뭇거뭇한 자국들로 지저분하게 얼룩졌고 그 흔적을 지우느라 한참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머리는 원하던 대로 새까만 흑발이 되어있었다. 만족스러웠다.


다음날 까만 생머리를 휘날리며 출근을 했고 주위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어머. 염색했네. 잘 어울린다."

" 그렇게 하니까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외상값 만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누군가 가슴을 손바닥으로 힘껏 막고 있는 것 같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매일 화장품가게 앞을 지나면서 사장님과 눈인사, 손인사를 나누곤 했었는데 갚을 돈이 있던 나는 그 앞을 외면하게 되고 사장님의 눈을 피해 다니게 되었다.

'아. 왜 화장실은 화장품가게를 지나야 만 갈 수 있는 거야.'

아직 월급까진 20일이나 남았지만 20일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만원이 없어서 월급날을 기다려달라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믿기나 하겠어? 이 나이에 만원도 없다는 걸......"


화장품 가게 앞을 지 날 때 미다 움츠러들던 어깨, 초점을 팔아먹은듯한 시선.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장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듯했다. 화장실엘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언니. 이리 좀 와봐."

고개가 떨어졌다. 

잠시 뜸을 들이던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 아니. 외상값 언제 줄 거야?"

"죄송해요. 월급 나오려면 아직  남아 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날 피해 다녀?"

"...... 면목이 없어서......"

"아니. 그렇다고 그깟 38000원 때문에 피해 다니느냐고?"

"네?"

이상했다. 내가 외상을 한건 10000원인데 사장님은 38000원을 얘기하고 있었다.

"저...... 10000원인데......"

"무슨 소리야. 언니얼마 전에 38000원짜리 화장품 외상했잖아."

"전 염색약값 10000원 외상 했는데요."

"어머, 이 아가씨 봐라. 무슨 염색약을 얘기하는 거야?"

사장님은 유리 장식장 안에서 검은색 케이스에 황금빛 띠가 둘러져 고급스러워 보이는 트윈케이크를 꺼내며 얘기했다.

"언니가 이거 외상으로 사갔잖아. 내일 가져다준다고 하고 계속 피해 다니고 있는 거잖아 지금."

난생처음 보는 트윈케이크이었다.

"아니에요. 전 이런 거 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노센트(당시 유행하던 나드리 트윈케이크)만 쓴 단말이에요."

아무리 얘길 해봐이도 안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 아가씨가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억울함을 뒤로 한채 가게를 나오는데 손이 부르르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사장님은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기억을 더듬어볼 생각조차 없는 듯 확고했다.


나는 10000원을 갖다 줄 수도, 그렇다고 38000원을 갖다 줄 수도 없는 입장이 돼버렸다. 여전히 화장품가게 앞을 떳떳하게 지나갈 수가 없었고, 얼마 안 있어 아르바이트를 관두면서도 내내 억울함과 찝찝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만원과 쪽지를 넣은 봉투를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이거. 옆에 화장품가게 사장님께 좀 전해줘."


'사장님, 살다 보니 이런 억울한 일이 다 있네요.

가끔 뉴스를 보면 사람들이 돈을 들여서라도 억울함을 밝히고자 배보다 배꼽이 큰 소송을 기도 하던데 이제야 그 이유를 저도 알 것 같습니다. 후에라도 혹시 착각했다는 게 생각나면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에 PCS 번호를 남겼다.

'018-○○○-○○○○'


아무리 기다려도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고 억울함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아니, 검은색 트윈케이크를 샀던 장본인이 나중에라도 나타났을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본인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지도. 하지만 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청하진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 이득도 없는 그 일을...... 굳이......



        






매거진의 이전글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