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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Mar 20. 2023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모할머니댁이 무당집이었는데 거기 가면 신당 안에 바나나가 올려있을 때가 많았다. 묵직하게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가 몇 무더기씩이나 있었지만 감히 맛을 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꼴깍꼴깍 침만 삼키며 상상 속에서 터뜨렸던 그 맛은 달콤함은 극치에 달하고 고소함까지 더해진 천상의 과일이었다. 거기다 투게더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 안는듯한 식감. 그런데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던 탓일까? 아빠 월급날 처음 먹어본 바나나의 맛은 실망스러움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물컹함이 도를 지나치고 달달하긴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할 만큼 밍밍한 데다 미적지근한 온도. 구미를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먹음직스럽게 매달린 노란 비주얼에 비하면 그 맛은 바나나우유나 바나나맛 풍선껌보다도 못했다.

'에이. 아빠가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차라리 가나초콜릿이라고 말할걸......'

그날 오랜만에 온 기회를 바나나에 써버리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다음번 아빠월급날에는 케이크를 사달라고 해봐야지.'


동네 빵집에 진열되어 있는 케이크는 로망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케이크는 생일날에 먹는 거던데  우리 집은 부모님 생일날도, 나나 동생 생일이 와도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아빠의 생일.

여느 날과 똑같이 집안에서 무료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꽃장식이 달린 버터크림케이크를 사들고 들어오셨다. 시선은 오직 케이크상자에만 집중이 되었고 반사적으로 놀던  모두 멈추고 흥분을 감출길이 없었다.

혼자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식욕을 자극하는 달달한 향기와 모양. 그런데 2조각이나 먹었을까? 포크를 내려놓게 만드는 느끼함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것도 내가 상상했던 만큼 환상적인 맛은 아니구나.'

욕심만으로 케이크를 억지로 입안으로 쑤셔 넣은 그날은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었다.


시간이 흘러 상상으로 맛을 창작했던 또 하나의 음식은 스테이크였다. 티브이를 보면 드라마 여주인공들이 포크와 나이프로 콩알만큼 잘라서 오물오물 먹는 스테이크. 두말할 것도 없이 갈비찜 맛일 거라고 상상을 했다. 입안에서 침과 함께 순식간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만큼 부드러운 갈비찜. 달달함과 짭쪼름한맛이 절묘하게 간이 잘 밴 갈비찜 맛. 하지만 이럴 수가!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처음 맛을 본 순간 표정관리가 어려울 정도였으니. 그 맛은 간이 하나도 없는 그냥 고기였다.

'뭐야. 이건...... 그냥 정식을 시킬걸.'

바삭한 돈가스와 그 옆에 나란히 나오는 함박스테이크와 샐러드가 너무 간절해지는 식사였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익숙지 않은 그 맛들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지금은 와인이 그렇다. 투명한 와인잔에 3분의 1 정도만 따른 적색 와인. 마시면 온몸을 적시고 휘감을 것처럼 풍부한 맛이 날 것 같지만 막상 혀끝만 닿아도 떠름함에 진저리가 쳐지는 걸 보면 와인의 세계로 빠져들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와인잔은 왜 세트로 잔뜩 사 둔 건지.  와인잔에 오렌지주스를 따라먹으니 느낌이 남다르다. 마치 오렌지색 달달한 와인을 마시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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