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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n 12. 2023

그분이 오셨다

나는 멋꽤나 부리는 아가씨였다.

멋은 자존심이었으며 내가 20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였기에 그 행위에 온갖 열정을 쏟아부었었다. 배꼽티에 립스틱을 바르고 손바닥만 한 백팩을 등에 메고 코르크 통급 샌들에 꾸준한 매직스트레이트로 찰랑대는 긴 생머리를 날리며 세상 이쁜 척을  거리를 활보했었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당시 가장 핫한 연예인 중 한 명이 투투의 멤버 황혜영이었는데 작고 깜찍한 이미지에 섹시하고 도도하기까지 한 매력은 우리를 열광하게 했고 노래방에 가면 일과 이분의 일 반주에 모두가 무표정으로 귀여운 척을 해 댔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렀고 지금으로부터 2년여 전이었던가, 티브이에서 우연히 황혜영의 일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책 속에 작은 글씨를 보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책을 멀치감치 떨어뜨려 읽는 걸 보고 스튜디오 안에 있던 패널들의 탄식 섞인 한마디. 

 "그분이 오셨군요. "

'아!  황혜영이 벌써 노안이 왔나 보구나.'


그즈음부터 나도 슬슬 그분이 오시고 있는 조짐이 보였고 지금은 결국 책을 읽을 때나 휴대폰으로 글을 쓸 때면 불편하고 힘들다. 특히 마침표랑 쉼표구분이 왜 이리 어려운지, 쉼표가 살아있는 듯 꼬리를 감추고 마침표는 아른거리며 꼬리를 만들어 그 둘을 분간하는 게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갱년기까지 문을 연 건지 토네이도처럼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 짜증 때문에 혼잣말로 욕도 얼마나 해대는지 모른다. 뜨거운 걸 만졌을 때나 물건을 놓쳤을 때. 도로의 클락션소리에 깜짝 놀랐을 때.

물론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하지만 누가 듣는다고 해도 크게 낯뜨겁지도 않을 것 같다. 두부가게에서 직접 만든 손두부만큼이나 얼굴까지 두꺼워졌으니 말이다.


얼마 전엔 길을 걷고 있는데 앞지르기를 당한 차가 약이 올랐는지 클락션을 1분여간 계속 울려대는 통에 짜증이 수문 터지듯 폭발해 버린 내가 그 정적소리에 목소리를 실어 욕을 얼마나 끈적하게 해댔는지 모른다. 지나고 나 어김없후회가 따라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요즘 내가 왜 이럴까? 갱년기를 가장한 분노조절장애가 아닐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라미란이 폐경 때문에 우울해 있을 때 아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주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쏙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현실의 식구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라 그런 감동을 만들어낼 생각도, 능력도 없는 듯하다. 또 그렇게 해준다고 한들 거머리처럼 소름 끼치게 몸에 착착 달라붙는 간지러움을 떼어낼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라미란처럼 고마움을 잔뜩 뿜어내며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제저녁에는 국은 떠먹지도 않고 퍽퍽한 밥만 삼키고 있는 아들에게 왜 그리 화가 나던지 내 잔소리에 되려 내가 지쳐 힘이 빠질 만큼 퍼부어댔다.

"야! 이거 끓이느라고 엄마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아? 근데 이걸 남겨? 남긴걸 누굴 보고 먹으라고, 처음부터 안 먹겠다고 하던가."

"그럼 버리면 되잖아."

"뭐 버리라고? 국은 땅 파서 끓이니? 이걸 끓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는 11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입은 멈추질 않았다. 예전에는 1절에서 끝났을 얘길 2절, 3절까지 끝도 없고 종착지도 잊은 채 줄줄줄 흘려보내고 돌아서면 또 후회를 한다. 반복에 넌더리가 나면서도 이 나쁜 습관이 이미 뿌리를 내렸는지 고쳐지지도 않는다.


불을 끄고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데 작은 글씨들이 넘실거려 보인다.

'황혜영도 노안인데 나라고 별수 있겠어?'

연관성 없는 이유로 합리화를 하고 있는 내 모습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래, 쉼표 마침표가 잘 안 보이면 캡처해서 확대해 보면 되는 거지 뭐. 그거외에는 아직 불편한 거 없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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