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스키 보이스보단 달달구리한 목소리를 좋아한다. 목소리와 닮은 고운 얼굴이어야 좋다. 하지만 성격이나 말투에는 남자다움이 배어 있어야 더 좋다.
소슬바람이 몸에 닿기만 해도 울컥하던 중, 고등학교 시절, 밤이면 골고루 어두운 방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듣던 간질간질한 목소리, 고막이 찢어지든지 말든지 볼륨을 양껏 높이면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느즈러지던 기억, 아직도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쯤 되었던가, 청소시간이었다. 교실창으로 깊게 밀려 들어온 햇볕을 쬐며 친구들과 수런거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 반 교실은 삼 층이었고 창밖 밑으로는 청소를 마치고 하교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신선한 바람이 향기로운 토요일 오후였고, 참으로 설레는 봄날이었다. 하지만 그 좋았던 날, 나는 난생처음 학교폭력이란 걸 당하게 되었다.
하교를 하는 무리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복 자율화로 교정이 온통 울굿 불긋했었는데 그 여학생의 복장은 그중에서도 유별났다. 눈부신 주황색 코트에 주머니가 볼록한 승마바지를 입고 바짝 치켜 묶은 머리가 날라리패션의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학교는 그녀의 놀이터 이자 성역이었다. 그 안에서 그녀는 으쓱으쓱 춤까지 추며 자못 자유로웠고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돌연 이런 말과 함께.
"미친년."
그때, 엉덩이를 씰룩대던 그녀가 갑자기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 속에 살기가 가득했다. 창가에 같이 있던 친구가 기함을 하며 얘기해 줘서 알았다. 그녀가 유명한 일진 선배였다는 것을. 아찔했다. 줄달음을 치며 도망가고 싶었다.
"야! 너 당장 내려와. 거기 서있는 세 명도 다 같이 내려와!"
사색이 되어 일 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근데 무슨 객기였을까? 속으로는 내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떨고 있었으면서 표정은 느물느물 웃음이 새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칼 같았던 새된 목소리가 귀에 하울링 되어 들려온다.
"야!! 니네 아빠 수박장사하니? 왜 이렇게 쪼개?"
정강이를 걷어 차이고,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리고, 죽고 싶냐? 미쳤어? 오늘 집에 기어서 갈 줄 알아, 등의 온갖 험한 말들로 두들겨 맞았다. 너덜너덜 해진 채로 집에 돌아와서 꺼이꺼이 울고 또 울었다. 그 뒤로도 나는 쥐새끼처럼 그녀를 피해 다니며 편치 않은 학교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걸린 후에 강제 전학을 당했다느니, 남자선배랑 동반자퇴를 했다느니,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 무성했다. 여하튼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날갯죽지가 간질간질했다. 곧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치만 그 시간은 무진 짧았다. 내 위에 직속 신께서는 무척이나 짓궂은 분이었던가 보다. 한 해가 훌쩍 지나고 다시 새 학기를 맞이 한 어느 날, 그녀가 일 년을 꿇고 우리 반으로 복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날따라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한 나는 이미 조회가 시작된 뒤에 등교를 했다. 뒷문을 열고, 허리를 숙이고 살포시 교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뒷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던지.
나중엔 둘이 유일무이한 사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친해지긴 했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위화감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내 우위에 있었고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나는 당시 가방에 미니카세트와 최용준 2집 테이프를 넣고 다녔었다. 야자가 끝나고 어둑한 버스 안에서 늘 같은 노래를 들었다. 최용준의 목소리, 가사, 멜로디가 절묘한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센티해지기 이를 데가 없었고, 나는 그 시간을 흠뻑 사랑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 테이프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도 최용준 노래 좋아한다면서 딱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정말 딱 하루만. 살점을 떼어주는 것만큼 아팠지만 스스로를 달래 가며 테이프를 그녀의 손에 넘겼다. 하루라는데 뭐.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테이프는 내게 오지 못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에 촉촉해진 채로 꿈결 같은 순간을 보내는 게 낙이었는데.
이미 발매된 지 몇 년이 지나 음반이 단종이 되었던 건지, 다시 살만한 여유가 없었던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라디오를 틀고 최용준의 '거울이 되어'가 나오길 기다렸던, 빨간 녹음버튼 언저리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모습만, 연습장을 북 찢어 나직하게 읊조리며 가사를 끄적였던 기억만이 선연하다.
나를 향해 울어버리는 까닭은 뭔가요, 당신의 눈물을 비추는 것은 내게는 커다란 슬픔인 것을
* 마지막은 최용준의 <거울이 되어> 가사 중 도입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