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유난히 작았지만 유난히 반짝거리고 눈에 띄는 친구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나는 엘튼존을 가르쳐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나는 토요일 방과 후에 으레 그녀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부모님이 직장에 나가서 집은 늘 비어있었고 그녀와 난 턴테이블에 LP를 걸어놓고 방안이 가득 차게, 크게 음악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녀에겐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가끔씩 집 안에서 마주치면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그쪽에선 내가 자신의 여유를 방해하는 침입자인 격이니 그럴만했다. 작은 이목구비를 일그러뜨리면 표정은 배가되어 동그란 얼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동생이지만 위압감이 드는 아이였다.
그날도 토요일 이른 수업을 마치고 여지없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윤상 2집을 샀다고, 앞면 세 번째 트랙의 노래가 끝내준다며 그녀의 성마른 입술이 들썩거렸다.
집에 동생이 없길 바랐던 건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떡하니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의 동생과 마주쳤다. 어깨엔 짐짝같이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짊어지고 양손엔 신발주머니와 만화책이 가득한 쇼핑백을 주렁주렁 달고, 늘 그렇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미간은 잔뜩 좁아진 채로, 나 화났소이다, 를 만면에 드러내며 서 있었다. 동생이 없길 그토록 바랐건만... 압력밥솥이 남은 김을 내뱉듯 내게서 작은 한숨이 푸우, 하고 터져 나왔다. 서로 인사 같은 건 없었다. 데면데면, 엘리베이터 혼자서만 기계음을 시끄럽게 내고 있었다.
그녀가 방문을 세게 닫고 볼록한 책가방을 벗어던지며 투덜거렸다. 동생 때문에 음악도 크게 못 틀게 되었다고 어지간히 짜증을 부려댔다. 그리고는 말미에 동생이 최근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단 얘길 했다. 그래서 잔뜩 부르터 있나?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여물 먹듯 우물우물 동생흉을 보고, 또 보고 했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주섬주섬 윤상 LP를 꺼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LP를 내려놓고 뿌드득,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면서 한 번에 몸을 일으켰다. 아이 씨, 동생방에서 음악 소리가 쿵쿵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동생방으로 가는 그녀를 따라나섰다. 성까지 붙여 동생의 이름석자를 꾹꾹 눌러 부른 후 방문을 사정없이 열어젖힌 그녀 앞으로 휙! 바람이 일었다.
그녀는 음악소리 좀 줄이라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다 이내 둔기에 얻어맞은 듯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줄이라고...
우리 둘의 표정은 조금씩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동생방에서 구슬 같은 멜로디가 또르르 굴러서 심장에 부딪혔다. 정수리가 찌릿찌릿했다. 가수의 목소리는 깨끗한 이슬이 달랑거리는 풋풋한 풀잎 같았다. 거기에 다정함까지 묻어있었다. 고막이 야들야들해져서 맥을 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누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은데?, 그러게, 좋은데?
겸연쩍은 목소리로 그녀가 동생을 다그쳤다. 그 노래, 그 가수가 누군지 당장 대라면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나 역시 지금 당장 알아내지 못하면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동생은 대답대신 짜증 나니까 문이나 닫으라며 데시벨을 한층 높여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한동안 방문 앞에서 그렇게 대치전이 벌어졌다. 누구 노래냐고, 문 닫으라고. 결국 마지못해 동생의 입에서 나온 가수의 이름은 의외였다.
"아 씨, 임백천, 임백천이라고."
임백천? 그녀가 갸우뚱하며 임백천을 여러 번 발음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보며 임백천이 가수였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뭐가 급했는지 짧은 단어를 얘기하는데도 발음이 자꾸 샜다. 제목. 제목.
"임백천 맞아? 너 뻥이면 죽는다, 야! 그럼 제목은, 제목은 뭔데?"
책상 의자에 앉아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흔들던 동생이 소리 나게 일어났다. 의자가 저만치로 물러났다. 한 대 때릴 것 같은 표정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온 그의 얼굴에 시뻘건 여드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일제히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괜스레 어깨를 동그랗게 말았다. 고개까지 절로 숙여졌다. 한 대 맞을까 봐? 아니, 문을 그냥 닫아버릴까 봐 겁이 났다.
"아! 진짜. 사랑스런 그대, 됐냐?"
이윽고 세게 닫힌 방문, 우리는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힘을 잔뜩 빼고 성이 빠진 동생의 이름을 부른 그녀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빌려줘.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어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