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연락이 안 된 지 몇 해가 되었는지, 이제 영영 묻혀버릴 사이가 되고 마는 건지, 서글픔이 시큰하게 올라온다.
내 묵고, 곰삭은 친구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만추에 접어든 가을, 남은 열매까지 모조리 떨어내 버리는 나무처럼 이젠 버석한 빈 가지뿐이다. 나의 유일했던 깊은 친구도 그렇게 멀어져 가는가 보다.
언제였던가, 내 전화를 받지 않은 그녀가 목소리 대신 문자를 보내왔다. 남편이 하늘나라에 간지 두 달이 좀 넘었다고 했다. 마음을 달래려고 보낸 건 아닌 듯했다. 뒷말을 생략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 였다. 곁에 있다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잘 안다. 네 맘을 어찌 다 헤아리겠니, 정도의 누구와 똑같은 상투적인 위로만 하고 있었겠지.
한동안 멍해졌고 눈물도 흘렸다. 그러고 나서 줄곧 그녀가 먼저 연락해 주길 기다렸다. 이때쯤이면 마음에 얇디얇은 막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또다시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휴대전화 속에 그녀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이젠 손가락을 꼽기도 헷갈릴 만큼 여러 해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녀는 고3 때 단짝 친구였다. 웃을 때면 눈두덩이도, 미간도, 얼굴의 잔근육들이 모두 따라 웃던, 눈매가 선하고 눈동자가 서글서글했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입시 미술 학원엘 다녔던 그녀는 당연히 대학도 전공에 맞게 산업디자인과에 지원했다.
대학 실기시험이 있었던 날 저녁에 그녀와 나는 소소한 추억 한편을 만들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근데도 이상하리만큼 난 그날 저녁의 일이 유독 짙고, 새록새록하다.
그녀는 그날 초주검이 되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목도리로 얼굴을 친친 감고 있었는데도 표정이 여실히 보였다. 아마도 목도리위로 드러난 떼꾼한 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추운 날 놀이터 그네에 앉아 메로나를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입에서는 추운 김이, 콧구멍에선 끈적함이라고는 일절 없는 콧물이, 아니, 그냥 맹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녀는 아침을 잘못 먹고 체한 나머지 시험장에서 실력발휘를 못하고 나왔다고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식은땀은 흐르고, 붓을 잡은 손은 벌벌 떨리고, 뭘 그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그 말 끝에 그녀는 어떻게 하지?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메로나를 녹이느라 입은 연신 우물거리면서도 눈동자는 오롯하게 나를 응망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오래 들여다봤던 것 같다. 까만 눈동자에 멍울진 빛이, 깜빡일 때마다 쏟아져 나올 듯 흔들거렸다. 도톰한 눈두덩이가 사력을 다해 그 빛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눈이 되게 슬프게 생겼어. 슬퍼서 슬픈 게 아니라, 슬픈 눈을 가져서 슬퍼 보인다고."
결국 동문서답만 한 꼴이 되었지만 꼭 그 찰나여만 했던 것 같다.
"뭐래니, 무슨 간장공장공장장도 아니고. 아니, 내가그린기린그림이냐?"
그녀는 부질없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네가 잔잔하게, 오래 흔들렸다.
그쯤에서 시답지 않은 얘기가 아닌,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내 입에선 위안도, 희망도 되지 못할 말이 심상하게 튀어나왔다.
"잘될 거야."
실기시험을 망친 것 같다는 걱정은 기우였는지 그녀는 대학에 무사히 합격을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레코드점 앞에서 흘러나오는 오태호의 노래를 듣고 나는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우두커니 서서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손엔 음반이 들려 있었다.
명목은 없었지만 작업실 입방식 선물 정도로 하고 오태호의 음반을 그녀에게 주었던 것 같다. 뭐야? 오태호? 갸웃하던 그녀가 제목을 훑어보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눈이 슬픈 그대?간장공장공장장? 아니, 내가그린기린그림인가?"
생각해 보면 딱히 유머랄 것도 없는 얘기가 그땐 왜 그렇게 웃겼던지 우린 그 얘기를 곱씹으며 두고두고 웃었다.
지금도 여전히 슬플 텐데, 아직도 울고 있는 거니?
이젠 슬픈 눈을 가져서 슬픈 게 아니라 슬퍼서 슬픈 눈을 하고 있을 그녀가 걱정된다. 그리고 오늘따라 무척이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