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나는 90년대 후반의 후끈했던 도시로 돌아가보려 한다. 생각만큼 오래된 기억도, 고리타분한 옛날은 더더욱 아니다. 그 기억은 여일 하게 쨍한 컬러이며 더듬어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맘만 먹으면 툭, 하고 머릿속에 떨어지는 걸 보면 가까운 과거가 맞는 것 같다. 단지 내가 엔간해서는 90년대 후반의 얘길 꺼내지 않는 이유는, 그때가 가장 혹독하게 추운 실연의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이십 대 중반의 나는 야금야금 잠식되어 갔다. 푹 패인 상처가 덧나서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데도 정작 나 자신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가장 즐겨 찾았던 곳은 압구정동이었다. 당시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시쳇말로 젊은이들의 핫플이었고 향락과 사치가 팽배하던 도시였다. 인천에 살면서도 굳이 전철을 타고 그 먼 곳까지, 숱하게 기어올라갔다. 화려한 열기에 섞여 있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잠시라도 모든 걸 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직업도 없이 놀고, 마시고, 또 놀았다.
그날도 백주대낮부터 압구정동에서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낮을 함께 보낸 후에 밤에는 다른 친구들과 유탕 하게 놀 작정이었다. 한 시간 이상 일찍 도착해 휘황한 도시의 세련된 향기를 맡으며 로데오 맥도널드 근처를 배회하다고 있었다.
그때 난 , 그 거리에서 나를 삼킨 노래를 만나게 되었다. 한 남자가 내 앞에 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빠른 눈으로 살피는 그는 나이트 웨이터나 오픈매장 홍보 아르바이트생쯤으로 보였다. 예상대로 그는 심상하게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가 준 것은 조악한 사진이 박힌 저급 명함도, 찬란한 색의 전단지도 아니었다. 그건 무료로 주기에는 꽤 값이 나가는 카세트테이프였다. 이리저리 돌려봐도 명함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가게 상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깨끗하고 오롯한 테이프 하나를 떡하니 쥐어주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가수이름을 보니 루트원, 생소했다. 요샌 신인가수 홍보를 이렇게 하나? 싶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 내가 만날 사람은 평소 알고 지내던 남자 선배였는데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압구정동에 일찍부터 나가있기 위한 방편으로 그를 선택했던 거였다.
대낮이었지만 조도가 낮은 카페는 어둑어둑했고, 옅은 담배연기가 카페 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선배는 몇 마디의 대화로 내가 변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표정은 카페 안에 파묻혀버릴 만큼 어두웠고, 연신 입을 씰룩이거나,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 앞에서 과장스럽게 천진한 눈으로 얘길 꺼냈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싶다고, 그래야 실연의 상처가 빨리 아물 것 같다면서 소개팅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선배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단단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가 턱을 치켜들고 채근하자 겨우 입을 뗐다.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은데?"
"음... 뭐, 그냥... 좋은 남자?"
선배의 대답은 비수였다. 섬광처럼 빠르게, 빠른 만큼 깊게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왔다.
"너 그거 알아?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네가 먼저 좋은 여자가 되어야 해."
내가 더 이상 좋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 난 전례 없이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실연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나는 내 모든 행동이 치유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거리로 나가면서도, 매일 누군가를 만나고 술에 찌들어 있었으면서도, 괜찮다고, 잊기 위한,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와 로데오 거리에서 받은 테이프를 오디오에 넣었다. 듣기 전부터 슬픈 노래일 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오디오를 타고 흐르는 노랫소리는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들어왔다. 눈물에 섞여 허옇게 묻어나는 파운데이션을 손으로 닦아냈다.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 흉하게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약속'이란 노래를 반복재생 시켜놓고 삼십 분쯤 울다 보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지쳐서 눈물을 틀어막으려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뭔 놈의 노래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어쩔 수 없이 울다 한번 죽어보자, 하고 또 울었다. 껍데기마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정말로 테이프를 나눠 준 목적이 신인가수 홍보였다면 사람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