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유튜브영상을 올리는 이유는 기록용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동생은 수년 전부터 취미로 색소폰을 불고 있다. 좋아하던 옛 노래위주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방문자를 기다리는 것도, 투망질을 하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실력도 아니다. 연주를 하고 나서 전소되는 것에 대한 헛헛함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동생에게 채널이름을 물었다. 동생은 '이별뒤에 그린그림'이라는 노래제목 끝에 색소폰을 붙여 검색하라고 했다. 그 노래를 색소폰으로 연주한 사람은 자기가 유일하다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김건모의 1집 수록곡이라 의미 있는 노래인데 왜 아무도 연주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잊고 있던 노래제목을 들으니 요원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스무 살에 나는 김건모의 1집 LP를 선물로 받았다.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동글동글했던 남사친 J 에게서.
서태지의 하여가가 가슴을 후벼 파던 1993년이었다. 지열로 아지랑이가 짙게 올라오던 여름, 이십오 도를 상회하는 더위를 즐기기 위해 친구 여럿이 '추도"라는 섬으로 캠핑을 갔다. 그때 J가 아니었다면 어떤 섬뜩한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비슷한 목소리로 울어재끼던 작은 섬안에서 나는 난생처음 술잔을 마주했다. 투명하게 찰랑거리던 그것은 깨끗한 척 시침을 떼고 연신 조롱해 대더니 어느샌가 꿀꺽, 나를 집어삼켜버렸다. 혀끝에 머물 시간도 없이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독한 속내를 감추고 쓴맛을 숨긴 요망한 고것이 나를 잘근잘근 씹어 넘겨버린 것이다. 그땐 알지 못했다. 독사처럼 날름거리며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그것의 속셈을.
안주로 집어먹었던 수박이 목젖을 치며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 기억을 끝으로 인사불성으로 취해 실신을 했다. 밤새 미몽 속을 헤매었다. 폭죽도 터지고, 포말이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헐떡이고, 전장에서 덜덜 떨기도 했던 것 같다. 다음날, 착 달라붙은 눈꺼풀에 힘을 주고 겨우 눈을 떠보니 친구들 모두 아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J가 나를 살렸다고. 누운 채로 끊임없이 수박덩어리를 게워내고 있는 내 목구멍에 J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두툼한 덩어리들을 빼냈다고 했다. 기도가 막힐까 봐 나를 모로 뉘이고 오직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것들과 사투를 벌인 것이다. 살아났냐? 배시시 웃는 J는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그 일 이후로 J는 내게 보호본능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밤, 집 앞으로 찾아와 김건모 1집 LP를 주고 갔다. 달빛아래 J의 표정은 야릇하게 어두웠고, 그러면서도 조요했다. 손끝이 따뜻했고, 목소리는 종전보다 나직했다. J는 별다른 말없이 김건모 얘기만 삼십 분가량 늘어놓았던 것 같다. 김건모 목소리가 생각 외로 발라드에 잘 어울린다면서 '이별뒤에 그린그림"을 추천해 주고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듣다 보니 "이별뒤에 그린그림"은 그 애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진하고, 스산한 구석도 있고, 어딘지 모르게 몽글몽글하고.
스피커가 움찔거리고 방안이 흔들리도록 그 노랠 들었다. 그 트랙에만 상처가 나서 툭툭 튀어 오를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그때 내 방에서 수없이 재생되던 노래가 동생의 뇌리에 각인된 게 아닌가 싶다.
스무 살, 처음 가졌던 미욱했던 술자리, 친구를 지키겠다고 목에 걸린 토사물을 빼내주던 J의 갸륵함,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걸 수도 있고, 그냥 우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벼락 치듯 그때의 단상들이 밀려온다.
마음이 흠뻑 젖을 정도로 J에게 고마웠어야 마땅한데 그땐 그걸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속이 비어 있었고, 철도 되게 없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도, 친구의 속을 들여다볼 줄도 몰랐던 내가 이제야 널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본다. 여전히 도화지는 하얗고 너는 진한 먹색이다. 세월은 미친 듯이 질주하고, 그로 인해 나는 늙었고, 그래도 너는 그대로다.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을 후회하는 피천득처럼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널 만난 적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내 그림 속에 넌 동글동글하고 다부진 모습 그대로라서 정말 다행이다. 날 만난 적 없는 너의 가슴속에 난, 손마디가 가늘고 턱이 날렵한 채로 남아 있을 테니 그게 가장 다행이다. 휴우~ 진짜로 진짜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