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자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2
3인 가족이 런던에서 최소 1년간 머물 집을 구하라.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아이 학교까지 30분 이내 거리여야 한다.
2. 완벽하게 안전해야 한다. 내겐 10살 딸이 있다.
3. 가구와 가재도구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funished)
아이 학교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우편번호 SW7, 런던에서도 집값이 가장 비싸다는 켄싱턴 복판에 자리잡은 사립학교. 이 학교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비싼 임대료를 의미했다. 안전도 곧 돈이다. 치안이 좋고 깔끔한 동네는 당연히 임대료가 비싸다.
우리는 가재도구를 살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갖춰진 집을 찾았다. 침대와 소파 등 기본적인 가구는 물론 냉장고와 세탁기, 식기류 등이 많을수록 좋았다. 초기 정착 비용은 덜 들겠지만 그만큼 월세는 비싼 집을 찾는 셈이었다.
안정된 상태로 시작하고 싶었다. 10월 중순께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의 여러 부동산 관련 사이트를 뒤졌다. 관심 있는 매물이 있으면 부동산 중개업체에 연락해서 세부 조건을 문의했다. 아이 학교에서 받은 스쿨버스 노선도를 부동산 업체에 공유해주고 그 선 안에서 집을 찾도록 했다.
집 안팎을 실제로 봐야, 또 집 주변도 둘러와야 할텐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뷰잉을 대행해주는 이른바 '정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집 추천과 뷰잉, 계약에 도움을 주는 것까지 요청하면 600파운드를 받는다고 했다. 100만 원? 차를 사고 은행 계좌를 트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동네 병원에 환자등록을 하고 하는 잡다한 것들까지 도움을 받으면 대략 한국 돈으로 200만 원은 줘야 한다고 했다. 그게 뭐라고 돈을 쓰나. 내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아도 대략 이해는 하니까 그냥 직접 하자,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직접 집을 살펴볼 수가 없으니 온라인 뷰잉을 요청했다. 사진은 온갖 렌즈를 끼고 찍어서는 후보정까지 해서 한껏 과장하고 꾸밀 수 있지만 영상은 아직 덜하다고 믿으면서.
생각보다 부동산 업체는 협조적이었다. 하긴 계약을 해야 돈을 버는 중개업체 입장에서 까다롭게 굴 이유가 뭐가 있겠나? 중개업체 직원이 직접 현장에 나가서 영상통화 형태로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소통하거나, 현장에 나가서 촬영한 영상 파일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러면 되는구먼.
고심 끝에 집 하나를 선택했다. 대형 쇼핑몰인 웨스트필드 인근의 셰퍼드부시 지역 플랏. 세컨 플로어(한국식으로는 3층)에 있는 678제곱피트, 19평. 투베드룸에 거실 주방, 욕실을 갖춘 집이었다. 각종 가구류가 갖춰져 있었고 아이 학교까지는 차로 15분 이내, 대중교통으로도 버스 한 번 타면 넉넉잡고 45분이면 충분했다.
뷰잉 과정에서 화장실 천장 페인트가 일부 벗겨지는 등의 소소한 문제가 눈에 띄었다. 목록을 작성해서 요청하자 집주인은 고쳐놓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커튼과 소파커버도 깨끗하게 세탁해주기로 했다.
임대료 호가는 월 2,600파운드, 나는 10%를 깎아서 월 2,340파운드를 제시했다. 중개업체에서는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밀려드는 런던에서 부동산 가격은 오늘이 가장 싸다(!). 일단 집주인이 제시한 가격을 받지 그러느냐'고 했지만 그런 게 어디 있나. 거래에 줄다리기가 없을 수 없다.
최종적으로는 월 2,550파운드로 정했다(결과적으로 많이 깎지는 못했다). 19평짜리 투베드룸에 월 임대료가 당시 환율로 420만 원쯤 되는 셈이었다. 물론 전기와 수도, 가스 요금과 BBC 수신료, 세금 등은 별도다. 부동산 관련 사이트에 공개된 이 집 가격은 687,000파운드. 환율을 8월 현재 수준인 파운드 당 1,745원으로 잡았을 때 대략 12억 원쯤 하는 집이다. 19평짜리 투룸이 12억. 이만하면 런던 집값 어떤가?
영국에서는 부동산 거래 할 때 세입자는 복비를 내지 않는다. 모두 집주인이 부담한다. 갑님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만큼, 세입자는 신뢰할 수 있는 자만 받으려는 것일까. 깐깐하다. 11월 1일, 계약 의사를 밝히고 이제 다 왔다 싶었는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갑님은 보이지도 않고 부동산 중개업체와 레퍼런스 체크 업체가 고문 수준의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요구하는 서류가 정말 다양했다. 이유는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외국인이고 영국 내에서 일을 할 계획도 없다. 과거에라도 영국 내에서 경제활동을 한 흔적도 없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할 만한 신뢰자본이 전무한, '믿을 근거가 없는 자'인 셈이다. 그러니 하나하나 들여다봐야 한다.
여권 사본, 재직 증명서, 딸 학교에서 발행한 입학허가서, 너나 너의 아내를 초청하는 기관이 있다면 초청장, 비자를 받았으면 비자 사본, 비자를 신청한 상태면 접수증, 항공권 사본, 한국 내 은행 계좌 잔고증명, 거주지 증명(공과금 영수증이나 은행 발행 서류. 영문주민등록 등본과 관리사무소에서 발행한 영문 입주민 증명서 제출), 영국 내 은행을 개설했다면 bank statement. 서울에 있는 집을 세 줬다고 하니까 그걸 증명하는 계약서 사본을 달라고도 했다. 자산 규모를 보려는 거지. 심지어 자기소개서를 요구했다.
은행, 재직 중인 회사, 동 주민센터, 아파트 관리사무소, 인터넷 대법원 등등 별의 별 곳에서 서류를 발급 받아서 스캔을 하고 또 했다. 됐다 싶을 때마다 새로운 요구가 날아왔다. 회사 취직하는 것보다 빡셌다면 과장일까? I don't think so.
이런 식이다.
너도 아내도 영국 내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돈을 벌지 않는데 집세를 낼 수 있겠어? 네 계좌에 적어도 75,600파운드가 있다는 걸 증명해. (월 2,550파운드 짜리 1년 계약을 하는데 7만 파운드 넘는 잔고를 증명하라고?) ㅇㅇ. 네가 외국인이고 영국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월세를 6개월치씩 내야 할텐데 아주 넉넉해야 믿을 수 있어. 월세만 내면 끝나는 게 아니라 너네 먹고 쓰면서 생활을 해야 할 거 아냐? 생활비 자금까지 다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거야. (하아...ㅇㅇ 보낼게)
특정 시점의 잔고 증명서 말고 석 달치 거래 내역을 줘.(왜?) 시스템에 그렇게 입력하게 되어 있어.(안 돼. 그게 필수라면 계약 못 하겠어.(그런 규모의 현금을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는 못했다)) 음 잔고증명서로 퉁쳐보자.
너 홀딩 디포짓*은 따로 내야겠다. 588파운드. (그건 또 뭐야) 본계약 전까지 우리가 보관해두는 개념이야. 1주일치 임차료 금액. (보증금? 이해함.)
(EPC*는 왜 제공 안 해? 그 집 엄청 추운 거 아냐? 전기 안전진단 보고서, 화재 경보기랑 일산화탄소 경보기 관련 정보도 줘.)ㅇㅇ 줄 거임.
계약 당사자는 비자가 있는 네 아내 이름으로 해야 해. 넌 permitted occupier로 명기될 거야. 잔고 증명을 네 아내 계좌로 다시 해와. 이게 안 된다면 1년치 월세 한꺼번에 낼래? (ㅋㅋㅋ;; 아내 명의 잔고증명을 드리겠읍니다. 바로요!)
숱한 줄다리기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 "찍지 마. XX 찍지 마. 성질이 뻗쳐서 증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은 보람. '임대차 계약 자격 있음'을 통보를 받았다. 무려 12월 13일이었다. 6주 사이에 못해도 6년은 늙었다.
끝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축배를 든지 딱 이틀 뒤, 12월 15일에 다시 "야 안 되겠다. 1년치 임차료를 한꺼번에 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신용을 완벽히 신뢰할 수 없다나. 하아 이 사람들이 진짜... 출국이 임박한 시점에 더는 못 하겠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숱한 고비를 다 넘고 우리는 12월 26일에 비행기에 탔다. 이삿날까지 임시숙소를 구해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계속)
*홀딩 디포짓
부동산 업체에 따라 본계약 전 보증금을 따로 요구하는 곳도 있다. 집주인이나 중개 업체의 고의나 중과실 혹은 부동산 물건 자체의 문제가 없는 가운데 세입자 쪽 고의나 중과실로 본계약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이 돈은 돌려받을 수 없다.
*EPC(energy performance certificate )
건축물에 부여되는 에너지효율등급. A (최고 효율) 부터 G (최저 효율)까지 7단계로 분류된다. 런던의 주택들은 워낙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B등급 찾기도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