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자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3
11월 1일에 계약 의사를 밝히고 6주만에 신원 조회(?)를 통과했다. 12월 26일에 런던에 도착한 뒤 보증금을 보내고 입주 날짜만 기다리던 중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집 진짜 괜찮겠지? 1월 19일에 가서 후회하면 우리 1년을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는 안 된다.
발단은 A가 제공했다. 임시 숙소 삼았던 첼시의 에어비앤비 집주인. 비교적 합리적인 금액에 숙소를 잡았다 했더니 집 상태는 '너저분'했다. 체크인 할 때 세탁기에는 젖은 빨래가 가득 들어 있었고 식탁 위 조명 전구는 꾸벅꾸벅 깜빡였다.
냉장고는 '혼자, 잠만 자는 방'에나 있을만큼 작았고 냉동고는 이용할 수 없었다. 로어 그라운드(지하)에 있는 주방과 식당은 너무 추워서 밥을 먹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식사 때마다 또 간식 시간마다 음식을 들고 두 개 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리느라 난 제법 건강해졌다.(응?)
침실은 퍼스트 플로어(한국식으로는 2층)였는데 물론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계단이 너무 좁고 가팔랐다. 이민 가방 세 개와 대형 트렁크 두 개, 기내 가방과 백팩까지 들어 올리느라 난 그 겨울에 땀에 젖었다. 침대 프레임은 낡아서 천이 너덜거렸고 커튼도 마찬가지였다. TV는 두 대나 있었는데 모두 켜지지 않았다.
계단 중간에 있는 욕실은 터무니 없이 좁았다. 초미니 샤워부스에서 몸을 돌리다가 손잡이에 팔꿈치를 찧고 음소거 비명을 지르는 일이 숱했다. 욕조? 있을 리가.
A는 분명 난방 하나는 빵빵하게 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웠다. 건물은 단열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창문 유리는 2중이 아니었고 나무 창문과 창틀은 헐겁고 부실했다. 서울 같았으면 이런 집들 싹 다 뜯어버리고 대단지 고층 아파트 분양해서 돈 벌 텐데. 가족들과 주로 스페인에서 지낸다는 A는 집에 투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무 불편해서 왓츠앱으로 연락했더니 A는 그게 왜 문제냐고 맞받았다. "너는 도착하자 마자 집에 대해 불평했어. 집을 좀 즐겨."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상한가? 아니 집도 이상하고 집주인 A도 이상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졌다. 우리가 들어가려는 집도 이상할 수 있어. 집 주인이 말도 안 되는 빌런이면 어떡하지?
그래, 우리가 대체 어떤 집을 잡았는지 눈으로 봐야겠다. 구글맵으로도 보고 영상통화로도 봤지만 못 미덥다. 긴긴 연말연시 휴무가 끝나자마자 부동산 중개업체 직원에게 연락했다.
1월 4일 오후
"해피 뉴이어 G, 우리가 들어갈 집을 보고 싶어. 우리 뷰잉도 온라인으로 그냥 했잖아."
"ㅇㅇ 물론이지. 근데 지금 한창 청소하고 페인트칠 하고 있을 거야. 니가 요구한 게 많아서 시간이 걸린다고."
"고마워. 그래서 언제 보러 가면 좋을까?"
"H가 현장 담당 직원이야. 걔랑 이야기해."
"(이 XX가...) 감사! 우리가 오케이 하기 전에는 이 계약은 완료될 수 없어."
당황하지 않고 부하 직원 G에게 메시지.
"H야, G에게 들었지? 우리 입주하기 전에 집을 좀 둘러보고 싶어."
"많이 messy한 상태라는 건 들었을 테고, 그래도 좀 정리된 뒤에 봐야 하지 않겠니? 다음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보지 그래?"
"...10일이나 11일에? 되는 대로 좀 빨리 보자."
"당겨볼게....10일이 최선이야."
"...고마워 그 날 보자,"
10일 오후, 우리 부부는 택시를 탔다. 약속 시간에 늦기도 했지만 아이 학교에서 집까지 차로 얼마나 걸리는지도 가늠해볼 겸.
H는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입밖으로 잘 나오질 않는 영어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거랑은 다르군. 나는 좀 풀어져서 엘리베이터 없는 2층(한국식으로는 3층) 집으로 올라갔다. 청소는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욕실 천장 페인트 등 문제들은 해결되어 있었다. 각종 주방기구도 약속대로 일부 갖춰진 상태였다. 음 뭐 괜찮네 했지만 아내 생각은 달랐다.
"일단, 시끄러워. 왕복 4차선 대로변에 집이 있잖아."
"집 앞에 도로가 있다는 건 우리가 처음에 구글맵으로 볼 때부터 알고 있던 정보인데..."
"저 도로는 차들이 막 달리는 곳이야. 교통량도 많고. 밤에도 시끄러울 거야."
"그래서 도로쪽 창문은 2중창으로 했나봐. 또 걸리는 게 있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아. 주변 지역 인구 구성도 그렇고. 또 학교까지 아무래도 오래 걸리는 거 아닐까? 말이 40분이지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거야. 10살짜리를 매일 데리고 등교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걸? 집은 너무 중요하고 큰 문제니까 신중하게 생각하자."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이 계약은 파기 될 운명이다.
집 본 다음날. 11일 오후 4시, H의 메시지.
"어제 너희 반가웠어. 자 이제 돈을 보내고 송금 내역을 캡처해서 좀 줄래?"
11일 저녁 7시, 회신은 현장 직원이 아니라 책임자인 G에게 보냈다.
"G,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유감이야. 우리 가족은 아주 어려운 결정을 했어. 최종 계약 성사 직전이지만 이 계약을 취소하기로 했어."
12일 오전 9시, 출근하자마자 G의 다급한 메시지.
"이런..무슨 일이야? 우리가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없어?"
"너와 너희 팀이 거의 2달간 노력해온 걸 나도 잘 알아. 미안하게 생각해. 우리 가족의 사적인 문제이고 결정이야. 돌이키긴 어려울 것 같아."
"부디 큰 일이 아니길 바라. 너와 네 가족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서울로 돌아가니?"
"그 카드도 고려하고 있어(라고 했다. 더이상 붙잡지 말라는 뜻으로). 내가 이미 보낸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겠지?"
12일 오전 10시 30분, H의 부재중 전화에 이은 메시지.
"G에게 들었어. 근데 이유가 뭐야? 괜찮은 거야?"
"세세하게 말할 수는 없고, 아무튼 우리 문제야."
"아 그러면 너 보증금 환불 문의했다던데 그건 돌려줄 수 없어. 집에 심각한 하자가 있거나 집주인 쪽에서 중대한 조건 변경을 요구하거나 했을 때만 환불할 수 있거든. 네가 네 사정으로 계약을 포기하겠다면 보증금도 돌려받을 수 없는 거지."
"ㅇㅇ 그러리라고 생각했어. 고마웠어. 행운을 빌어."
이렇게 끝났다. 11월 1일에 내가 계약 의사를 밝힌 집이. 6주 넘게 신원조회 고문을 견딘 집이. 100만 원 가까운 돈을 포기하면서. 실제로 집에 가보고는 곧장 이렇게나 쉽게 계약 파기 결정을 할 때는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플랜B를 준비하고 있었다. 즉시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초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 학교에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로. 제3의 부동산 업체는 SW7 지역 안에서 꽤 많은 물건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비교적 괜찮은 곳이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