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4
1월 초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아이 학교 인근 집을 보기 시작했다. 이 글의 배경은 SW7, 런던의 중심 지역인 zone 1중에서도 캔싱턴임을 감안하고 보셔야 한다. 지나치게 비싸서 눈물겨울 거라는 얘기...
서비스드 레지던스는 주방 시설이 갖춰진 1베드룸 1소파베드 형태 방이었다. 이틀에 한번꼴로 청소와 침구 교체 서비스가 제공되고 전기와 수도 요금, 세금 부담은 따로 없는 개념이었다. 아이 방학 때 장기간 유럽 여행이라도 간다면 그 기간동안은 짐을 다 빼면 임대료는 안 내도 되니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바로 앞에 대형 마트가 있는 점도 좋아 보였다. 세 식구가 매일 외식을 하다가는 거덜 날 테니, 자주 식재료를 사다가 조리를 해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유일하게 나쁜 점은 임대료. 일주일에 850파운드, 매달 주거비로만 560만 원 넘게 내야 한다니 어안이 벙벙. 1년간 지낸다면 장기숙박 할인이 있을 법도 한데 끝내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 못 가지.
부동산 업체 직원 S는 스페인 출신 젊은 친구였다. 늘 어딘가 피곤해 보이긴 해도 이 친구, 매우 적극적이었다. 때때로 밥 먹을 짬도 없을 정도로 뷰잉으로 바빠서 그런가 빈틈은 많았으나. 영국에선 한국처럼 빠릿하고 정확한 걸 바라면 안 되는 법이다.
처음엔 우리 부부를 lower ground 집으로 데려갔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지하겠으나, 런던 건물들은 도로와 건물 사이에 공간을 떨어뜨려 놓아서 한국의 지하/반지하와는 달랐다. 창 밖으로 바로 행인들의 발이 보이거나 호기심 많은 관광객과 눈을 마주치는 지경은 아니었다. 공간이 있는만큼 아주 침침하거나 눅눅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무리 최악은 아니라 해도 지하는 꺼려져서 패스.
부동산 업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A stunning raised ground floor apartment in beautiful condition throughout with exceptionally high ceilings, parquet flooring and beautiful period details.
Set within a handsome, white stucco fronted building within close proximity to the green open spaces of Hyde Park, this well position one double bedroom apartment boasts easy access to the areas many shops, cafes and restaurants and the transport links of both Gloucester Road and South Kensington
raised ground floor는 그라운드 플로어인데 계단참이 있어서 살짝 올라와 있다는 얘기다. 계약을 하면 켄싱턴 거리에 널려 있는 흰 건물 중 하나에 살게 된다는 건데, 말마따나 천장이 높고(3.72미터) 멋드러진 샹들리에가 달린 방이 아름다웠다. 큰 창으로는 볕도 아주 잘 들 것 같았다. 눈썰미 좋은 분들은 이미 한번 눌러보셨을, 필자 소개 사진에 있는 바로 그 방이다.
임페리얼컬리지 바로 앞에 있어서 중동계나 중국계 학생들이 주로 거주했던 모양이다. 침대와 소파 등 기본적인 가구는 물론이고 이불과 각종 주방용품, 그릇, 컵 등 식기류에 커틀러리까지 모두 있었다. 새로 온 친구들이 계속 사들였는지 진공청소기는 두 개가 있었고 심지어 금고(못 열어봤다 아직도)와 체중계도 있었다. 서랍장에는 닌텐도위와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TV 아래 장식장에는 오디오와 스피커 세트가 처박혀 있었다. 우린 아랍 왕자와 중국 공주가 살았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초기 정착 비용 0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걸리는 게 없지 않았으니, 집은 작은데 터무니 없이 비쌌다. 569제곱피트, 16평에 못 미치는 집 월세가 3,100파운드로 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세금과 각종 공과금을 더하면...숨만 쉬어도 550만 원쯤은 매달 녹아내릴 판이었다. 내가 여기서 일이라도 하면 모를까 그냥 받을 수는 없는 조건이다.
내가 집을 보고 곧바로 제시한 첫 금액은 월 2,900파운드였다. 2,550파운드짜리 계약을 위해 보증금까지 보냈다는 점을 호소하면서 집주인이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어라? 그런데 S는 내 제안을 'strong offer'라면서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고뤠?
공은 S의 팀장 H에게 넘어갔다. H에게는 소심하게나마 조금 더 내려서 제시했다. 한 달 2,850파운드. 사실 여전히 어마어마한 돈이고 직전 집 계약 금액 2,550파운드보다도 더 비싸긴 하지. 그래도 딸아이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컷으로 오는 비용으로는 나쁘지 않다 자위했다. 지각했다고 택시만 몇 번 타도 그 돈 깨졌겠지. 이미 다른 부동산과 두 달 가까이 씨름한 경험이 있는 나는 '6개월치 선불 가능!' 먼저 질렀다. 1년치를 한꺼번에 낼 뻔도 했는데 반년치는 뭐.
H는 이 집 종전 계약이 2,840파운드였다면서 곤란해하면서도 집주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전 가격에 딱 10원 얹어서 제시했네? 별 기대는 않고 있었는데 집을 팔 생각인 주인 M은 그걸 또 승낙했다. '매수 희망자가 집을 보러 올 때 좀 잘 협조해달라'는 조건만 달아서. 아일랜드 할아버지의 호방함! 사실 곧 팔 집인데 비워두느니 임대료를 어떻게든 받는 편이 나았겠지. 과거는 묻어두고 미래로 나아갑시다(?).
집을 본 다음날 곧바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tenent referencing이 시작됐다. 서명은 중요하지 않더라. 이전 경험을 볼 때 돈이 가야 뭐든 진행되는 것 같았다. 6주를 괴롭혔던 레퍼런싱 경험에 긴장했지만 이 업체는 또 굉장히 빠르게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 전 업체가 이상한가 이 업체가 나이브한가. 혹은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가 된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쉽게 끝나서 다행일 뿐. 1월 16일, 아이 학교 바로 앞 독일 레스토랑에 가서 소시지와 피자를 놓고 축배를 들었다.
1월 19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리바리 이민가방을 챙겨서 택시로 이사했다. 비앤비에서 새 집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릴까? 짐가방을 끌고 밀고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푼돈 아끼자고 고생하지 말기로 했다. 파란만장 집 구하기는 에어비앤비 빌런 A와의 계약 마지막날에 딱 맞춰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12월 26일 입국, 호텔과 에어비앤비를 거쳐 1월 19일 최최종 이사. 괜찮은가? 이제 홈 스위트 홈에서 즐거운 런던 생활이 시작될 참이었다. 하지만 이 집에는 우리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