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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Aug 22. 2024

쥐를 잡다...첫 10일 사이 두 마리나

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5

1월 19일 이사 후 잡다한 일거리들이 적잖았다. 아랍 왕자와 중국 공주는 왜 물건을 사들이기만 하고 치우지는 않았을까? 부서진 의자는 방치되어 있었고 벽장에는 지저분한 이불과 베개까지 그대로였다. 새로 온 친구마다 TV와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했는지 작동하지 않는 셋톱박스가 대여섯 개는 쌓여 잇었다. 샹들리에가 정말 아름다우려면 불 꺼진 전구들을 갈아끼워야 했다. 샤워부스의 유리판은 위험천만하게 덜렁거렸다. 분명 입주청소를 했다던데, 이건 다 뭐란 말인가. 


무엇보다, 냉장고가 없다

냉장고를 설치하러 왔던 사람들은 콘센트를 찾지 못해 설치가 불가하다며 돌아갔다. 집주인 M이 한번 와야 할 것 같은데, 입주 직후에 오겠다던 그는 업무상 카타르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참 글로벌하기도 하지. 그러더니 귀국한 뒤에도 영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일랜드 할배는 이 집에 관심이 없었다. 


일단 M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임시 소형 냉장고를 놓기로 했다. 1월 21일에 아마존에 주문한 냉장고는 새벽배송까지는 아니라도 바로 다음날 도착했다. 반찬통 두어 개와 우유 따위만 넣으면 문이 안 닫힐 정도로 작고 하찮은 냉장고였다. 단돈 60파운드짜리였으니까 불편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매일 먹을거리를 사러 나가는 것쯤은 운동 삼아 재미 삼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처음 온 손님은 숨을 쉬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질어질한 나날들. 아마 1월 26일이나 27일이었을 거다. 거실에 있던 아내가 사색이 되어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때 설거지를 하고 있었던가. "쥐가 나왔어. 어떡해!" "뭐가 나왔다고?!" 달려가보니 진짜 쥐가 한 마리 거실 바닥에 있었다. 붙박이장과 벽 사이에 5센티미터가 될까말까 한 틈이 있는데 아마 거기서 기어나온 모양이었다. "잠깐만...나도 내손으로 쥐를 잡는 건 처음이라고!"


하아...이걸 어쩐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 손님은 움직이지 않는다. 건드려도 반응이 없다. 이것은 불행인가 다행인가. 지금 벽에서 나온 아이가 죽어 있다? 사태 파악이 안 되지만 일단 황급히 사체를 주워서 집 밖 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다. 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갖은 물건이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더니 그래서 이런가?


또? 이번엔 살아 있다!

끝이었다면 좋았겠으나 아내는 또 한번 다급했다. 1월 29일 저녁에 다음 분이 방문했다. 거실 소파 옆에 엎드린 상태. 이번엔 분명 살아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처리할게 안방에 가 있어." 


"잠깐만!" 10살 딸은 이 사태를 모르는 게 좋겠다. 우린 생전 보여주지 않는 유튜브를 보라고 아이패드를 들려주고는 아이를 안방에 보냈다. 비닐장갑을 끼고 빗자루를 들고 덮쳤는데 어라? 상태가 이상하다. 움직임이 너무 둔해. 쉽게 생포했다. 가만 보니 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빗자루로 쓸어담아 지퍼락에 넣었다. 그 와중에 집주인에게 알리겠다면서 머그샷도 찍어뒀다. 사진을 여기 첨부할까 하다가 포기. 혐짤은 옳지 않다.


두 번째 손님은 다른 통로로 온 게 분명했다. 붙박이장과 벽 사이 좁은 틈. 지난번엔 왼쪽이었는데 이번엔 오른쪽. 핏자국은 거실 붙박이장과 오른쪽 벽 틈에서 소파쪽으로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역시 CSI급 증거 수집. 그 친구도 집 밖 쓰레기통에 처리했다.


닦고 또 닦고...퇴치기도 꽂았지만

내가 증거를 모두 수집하자 아내는 거의 필사적으로 청소를 했다. 소독제로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쥐도 쥐지만 체액이 곳곳에 있었으니 감염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했다. 독한 약품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열흘 사이에 두 번이라...상황 판단을 해야 했다. 쉽게 잡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한번은 사체, 한번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쥐약을 먹은 상태로 이 집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공동현관에는 "이 동네에 쥐가 출몰함. 음식물 관리에 주의하시오" 뭐 이런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있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


영국에선 전문 자격 없는 사람은 쥐약을 놓을 수도 없는 모양이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뭐라도 하자. 나는 바로 아마존에서 설치류 퇴치기를 주문했다. 쥐들이 싫어하는 초음파를 발생시키는 기계인데 콘센트에 꽂아두는 형태다. 이걸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다시 방문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확신은 없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한 세트에 네 개씩 들어있는 포장이었는데, 배송된 걸 꽂아보니 두 개가 작동이 안 되네? 하아... 반송시킬까 하다가 아니다 일단 두 개라도 꽂자. 추가로 한 세트를 더 주문했다. 다시 온 물건은 모두 정상 작동. 안 되는 놈을 넣어서 한 세트는 반품했다. 익스텐션을 틈새 쪽으로 끌어다가 퇴치기를 꽂고 주방과 한방에도 구석구석 켜뒀다.


사실 촌놈인 나는 쥐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쥐는 어디에나 있다. 인간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렇지. 시골집 천장에서는 밤마다 쥐들이 다다다닥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게다가 여긴 런던이고 우린 지은지 오래된 집에 입주했다. 쥐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겠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우리집에, 우리가 이용하는 공간에 출몰한 이상, 게다가 아주 좋지 않은 상태로 나타난 이상 아내와 아이가 겪을 공포를 해결해야 했다. 서울에서, 관리가 잘 되는 현대식 공동주택에서 살던 사람들이 집안에 쥐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실질적인 문제라기보다 가족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정착을 위해서. 서둘러야 한다. 버럭 까칠 불안 당황이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문제는 늘, 런던의 속도

집주인 M에게 상황이 엄중하다고,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 집에는 10살 여자아이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빠른 시일 안에 방제 전문가들이 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M은 아이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를 제기하자 곧바로 수긍했다. 영국에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사람들 반응이 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긴 런던이다. 문제는 주로 느려터진 속도에서 발생한다.



*BBC 수신료

영국의 BBC 수신료는 연간 169.5파운드, 대략 30만 원 정도다. 월 2,500원, 연간 3만 원인 한국 공영방송 수신료에 비하면 거금이다. 텔레비전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것 뿐 아니라 iplayer로 지난 방송을 볼 수 있고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다.


*대형 폐기물

한국에서는 사전에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사서 수거 장소에 내놓으면 청소 차량이 와서 가져가는 간편한 시스템이지만 런던엔, 적어도 캔싱턴엔 그런 게 없었다. 쓰레기를 받는 장소가 따로 있고, 거기까지 주민이 직접 가져가서 돈을 내고 버리는 시스템이라 했다. 집 앞에 부서진 의자를 내놓은 우리를 CCTV를 돌려서 찾아낸 관리인 T가 알려준 얘기였다. 막대한 벌금을 물 수 있으니 빨리 집 안으로 다시 들여놓으라고 하다가 난감해 하던 내 얼굴을 본 그는 자기 차에 싣고 가서 대신 버려주마 했다. 20파운드만 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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