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7
집에 쥐가 출몰한지 10일이 지나면서 예민해진 탓일까. 부부는 갈수록 자주 지지고 볶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를 해결할 수단은 별로 없다. 낯 설고 물 설고 말도 안 통하는 이국 땅에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학교 생활에 신이 났다. 그나마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보채지 않는 게 대견했다. 아이까지 적응을 못하는 상황이면 정말 눈물 났을 거야...
나름대로 해결을 해보겠다고 구청 격인 카운슬에도 민원을 제기해봤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으니까 이런 민원 정도는 해도 되는 거겠지. 집주인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세입자 보호 조치를 해달라고 구청에 매달릴 작정으로 미리 자락을 깔아둔 거였다. 하지만 RBKC(Royal Borough of Kensington and Chelsea)* 직원은 이메일만 두어 번 더 보내더니 별 반응이 없었다. 다행히 집주인 M이 움직이고는 있으니 좀 지켜보기로 하자. 느려 터져서 열불은 날지라도.
난 왜 서울의 인프라와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이러다 득도하겠다. 온갖 존재론적 고민이 오가는 사이, 그날이 왔다. 내가 산타 할아버지도 이렇게 기다리진 않았다. D+12, 라젠카 세이브 어스. 하지만 12시에서 4시 사이에 오겠다던 방역업체 직원이, 역시나, 오지 않는다. 도착 한 시간쯤 전에는 연락을 하겠다더니 연락조차 없다.
2월 9일
"(화 낼 힘도 없음)지금 오후 4시가 다 돼가는데 니들 언제 오니?"
"아 벌써 3시 50분이네? 앞 집 작업이 좀 길어지고 있어. 내일 가면 안 될까?"
"하아...최대한 빨리 와줘. 나 그냥 기다릴게."
"그럴래 그럼? 연락할게."
"4시반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것들이 올 수 있는데 오늘 그냥 째고 싶었던 거구먼?)ㅇㅇ 와. 빨리."
애초에 12시부터 4시 사이라니. 이들은 약속 시간을 왜 이렇게 잡는가. 그나마 넓게 잡은 그 시간마저 왜 못 지키는가. 시간을 못 지키고도 왜 딱히 미안해하지도 않는가. 악명 높았다는 코리안타임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국병은 상상을 초월하는 중증이다.
한국에서라면 서비스 평가를 박하게 때릴 만한, 아니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항의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것 같다. 늘 여유를 두고 상대를 배려하며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음식점에서 음식이 엉망진창이어도 서버가 와서 'everything ok?' 물으면 엄지 척. 뭔가 직접적으로 불만을 늘어놓고 따지는 것 자체를 품위 없다고 여기는 것도 같았다. 반대로 내가 일하다가 어떤 사정 때문에 늦어지거나 실수를 하게 될 수 있고 그 때는 또 상대의 배려와 이해를 구해야 하니, 내가 먼저 이해하겠다, 뭐 그런 태도랄까.
한편으로는 노동조합, 노동자 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길고도 치열한 역사가 있다보니 누구도 쉽사리 노동자를 거칠게 대하지 못한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동시에, 조직 노동운동이 가장 빨리 시작된 나라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툭하면 지하철이 어떤 노선 전체가 운행을 중단하고, 멀쩡하게 가던 시내버스를 세운 뒤 여기서 운행 종료하니까 다 내리라고 하기 일쑤다. bbc의 아침뉴스에는 매일 지하철 운행 현황이 나온다. 디스트릭트 라인은 심각한 지연 상태고 서클 라인은 운행을 하지 않으니 참고하라, 그런 식이다. 그래도 버스나 지하철역에서 고함 치는 사람은? 물론 없다. 어깨를 으쓱 하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검색을 하거나 점잖게 물을 뿐이다. 그래 좋아. 다 좋은데 답답해 죽겠어 난.
지금 이 상황에 나도 그래야 하는 걸까? 그래야 하는 거지? 불만이 생길 때마다, 이해가 안 될 때마다 더욱 꾹 참는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능숙하게 다 뱉어낼만큼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 난 쉽게 평정심을 잃는 이해할 수 없는 동양인으로 각인되고 싶지는 않다.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한다. 차라리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웃고 만다.
20대 후반쯤 될까. 방역업체 직원은 바지를 너무 내려 입어서 내가 불편하다. 나는 네 엉덩이 골에 아무 관심이 없다, 아니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니 뭐 넘어가자. 너는 '요즘 이 지역에 쥐들이 활개를 친다'면서 짐짓 신난 표정이다. 이번주에만 열다섯 집 넘게 의뢰가 들어왔다나? 너는 돈을 버니까 좋겠지만 우리는 괴롭다고.
런던엔 어디에나 쥐들이 있는데, 우리 집은 그라운드 플로어니까 없다면 더 이상한 거라고도 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있는 놈들은 잡고, 놈들이 또 들어올 만한 구멍이랑 구멍은 다 찾아서 막아줘.
그런데 이상했다. 집 안팎을 살펴보더니 외부에서 쥐가 들어올 만한 통로가 안 보인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디 천장에서 떨어졌을까? 분명한 건 그들이 활동한 흔적이 존재한다는 것. 부엌 싱크대 아래에 배설물이 있었다. 다행히 화장실과 안방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확인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응 그래야지. 그런 자신감 있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나는.
"이렇게 하자. 일단 나는 오늘 여기저기 쥐약을 놓을 거야. 독극물만 놓는 게 아니라 형광물질을 함께 넣어둘 거야. 걔네가 먹이를 먹으러 통에 일단 들어갔다가 나올 때 발자국이 찍히도록. 그럼 이 친구들이 아직도 집안에서 활동하는지, 집 밖에서 들어온다면 어디로 들어와서 어떤 경로로 돌아다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대략 개체 수도 알 수 있고. 일 주일 정도 얘들 활동을 지켜본 뒤에 다음주에 퇴치 계획을 세울게."
"이 상황을 일주일 더 견뎌야 하는 거구나?"
"미안하지만 사실은 2주야. 약을 놓고, 얘네들의 활동 흔적을 확인하는 게 1주일이고 그 다음에 내가 조치를 할 거잖아? 그러고 나서 우리 의도대로 잘 해결됐는지 확인을 해야 해. 그거까지 하면 앞으로 최소 2주는 더 걸릴 거야."
"하아...ㅇㅇ 그래. 근데 일단 오늘은 약만 놓고 가는 거야? 얘네들이 밖에서 들어올 만한 구멍이 진짜 없어? 그걸 막아야 하잖아. 내가 잡은 애들 상태가 분명 독극물을 먹은 것 같았거든. 우리 집 안에는 쥐약이 없고. 그럼 구멍이 있다는 얘기잖아. 외부에서 약을 먹고 들어와서 죽은 애나 죽어가는 애를 또 보고 싶지 않다고."
"니 입장은 아는데 일단 육안으로는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 청소할 때나 이사할 때 문이나 창문을 열어놓고 작업을 하잖아? 그때 들어왔을 수도 있어. 아무튼 이동경로를 확인 해보고 다음주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방역 업체 직원은 독극물과 형광물질을 집안 곳곳에 잔뜩 남기고 돌아갔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동경로를 표시해주는 형광물질까지 닦을 수 있으니 가능하면 청소도 하지 말고 지내라고 했다. 세 식구가 빠뜨린 머리카락이 금방 뭉쳐서 굴러다녔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지만 끝내 답이 안 보이는 상황. 앞으로도 더 견뎌야 한다. 최소 2주.
마침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루나 뉴이어도 아니고 차이니즈 뉴이어라고 부르는 설. 아내의 친척 언니네를 만나기로 했다. 형님 J는 영국인이니까 조언을 좀 구할 수 있겠구나. 명절을 기다린 게 언제였더라? 직업 특성상 긴 연휴 전에 오히려 일이 많고 연휴에는 꼭 당직이 있어서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다. 이번엔 절박하다. 동앗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런던에서 설날을 기다렸다.
*RBKC(Royal Borough of Kensington and Chelsea)
캔싱턴 첼시 왕립 자치구. 런던에 왕립 자치구는 딱 세 곳이다. 그리니치와 캔싱턴&첼시, 그리고 킹스턴.
캔싱턴 첼시는 관내에 1819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나서 1837년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살았던 캔싱턴궁이 자리하고 있다. royal borough 지위는 1901년에 부여되었다. 런던에서 가장 작은 자치구지만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borough다.
캔싱턴 궁전과 부유층 주거 지역, 세계 각국의 대사관 등이 밀집해 있다. 제곱킬로미터 당 12,000명이 거주하는, 영국 내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영국 평균 인구 밀도의 14배가 밀집해 사는데 외부 방문객과 여행자들 유입도 적지 않다. 그런만큼 집값이 비싸고 쥐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