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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시작하기

영화 보기에 앞서

by 아피

영화를 보는 것은 어쩌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스트리밍과 구독 문화가 매우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자리 잡기도 했다.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플러스 이런 스트리밍 서비스를 한 개도 구독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되려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 말인즉슨 영화를 보는 것이 매우 간편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짧으면 한 시간 반에서 길면 세 시간까지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나만 해도 어제 서울로 올라가는 ktx에서 아이패드에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면서 왔으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보기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얘기는 영화 접근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영화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르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한 편이다. 자의적으로 화면을 넘기다 그냥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영화를 재생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면 기억해 두거나 다른 곳에 적어두고 나중에 혹은 한참 나중에 영화를 본다. 이런 행동은 하나를 해도 완벽하게 해야 하는 강박과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러닝타임을 채워서 보는 것도 그렇고 영화의 모든 대사와 상황을 이해해야겠다는 어떤 강박적인 마음이 있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긴 러닝타임도 발목을 잡는다.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하는 나로서는 약 두 시간 정도의(최근 영화는 세 시간에 근접하기도 한다.) 영화를 한 자리에 앉아서 보는 게 너무 불안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이유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걱정이 너무 많다는 거다.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벌어질 어떤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까 걱정이 돼서 긴 시간을 쏟아 영화를 보는 일이 더욱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새로운 영화를 한편 보는 것이 매우 엄중한 과제처럼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미뤄놓고 아직까지 보지 않은 영화가 산더미처럼 많은데 대표적으로 인셉션, 매트릭스, 헤어질 결심 이런 영화들이다.


소문난 명작은 너무 쉽게 볼 수 있지만 그 영화를 보기까지 마음먹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더 어려워졌다. 모든 영화적 메타포와 장치를 뜯어봐야 할 것 같고,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분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메라가..., 사운드가..., 이 공간 캐스팅은..., 이 색감은.... 이런 걸 다 생각하면서 영화를 볼 수가 있나 스스로 생각하지만 부모님이 tv를 볼 때 어느 순간 따지고 있는 걸 자각하면 섬찟 해진다.


사실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라고 가르치시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강박을 가지라고는 말하진 않으셨다. "처음볼 때는 그냥 느끼세요, 그다음에 여러 번 보면서 분석하는 겁니다."라고 교수님이 말했다. 막상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하면 영화에 집중해서 '그냥 느끼기'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르고 따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이런 어긋난 배움... 영화 보기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어제 ktx에서 본 영화는 '수면의 과학'이라는 영화로 나온 지 약 18년 정도 된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고 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이었다. 11월 18일에 5,500원을 주고 사놓고 한 달이나 지난 12월 19일에 봤다. 이렇게 오래 걸린 나름의 이유는 분명 있다. 일단 기말과제와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개인 공부를 하기 위해 다른 영화를 지겨울 정도로 다시 보고 분석문을 작성하느라 도통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렇지만 그 한 달 동안 과연 내가 100분의 시간이 도통 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분명 꽤 여러 번 100분이라는 시간을 그냥 날렸을 텐데 그럼에도 영화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방학하고 집에 가는 날 세 시간 동안 ktx를 탈 일이 생겨 일주일 전부터 계획했다. 이날 기차 안에서 영화를 봐야지! 영화는 좀 지루했고 잠에 들 것 같았고 꺼버리고 잠을 자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던 것도 있다. 끝을 봐야 하는 어떤 집념이 영화를 다 보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걸까? 그냥 넘기다가 보이면 볼 수 있는 걸까? 영화는... 영화가... 영화... 영화....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어떻게 영화를 시작해야 할까? 쉽게 영화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영화를 그렇게 손쉽게 골라서 볼 수 있으신 거죠? 영화를 시작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그것이 진리는 아니지만 영화를 시작하는 마음을 더 가볍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다음에 볼 영화를 정하지 못했다. 언제 다음 영화를 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음에 볼 영화는 좀 더 빨리 가볍게 '그냥 느끼기'의 배움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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