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영화가 있으신가요?
"인생 OO"
너무 쉬워진 단어다. 길 가다가 그냥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해지지 않았나? 잘 생각해 보면 살면서 몇 번 없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소중한 무언가를 이루는 말 일 텐데 너무 쉽게 쓰이는 것도 참 신기하다. 이런 면에서 은근 보수적인 나는 인생 OO라는 단어를 보고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느낀다. 슬픈 건 아니고... 기쁜 건 더 아니고... 안타까움? 굳이 따지자면 화가 나나? 화가 날 이유는 없지만 '왜 인생의 가치를 저렇게 가볍게 취급하는 거야? 그런 게 있을 수 있어?' 하는 생각을 한다. 단어가 지닌 무게감이나 가치가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소비되고 잊히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허무감이 든달까? 대표적인 게 부스에서 찍는 네 컷 사진 일 텐데 분명 소중한 오늘을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겠지만 약속이 생길 때마다 의미 없이 찍어대는 탓에 이걸 굳이 왜 찍나 싶기도 하다. 물론 사진을 찍으면 추억도 생기고 좋겠지만 많이들 어디 놨는지조차 까먹는 걸 보면 의미 없다 싶기도 하다. 손에 쥐고 있는 기억이라고 생각해서 찍었겠지만 금방 다 잊어버리고 만다. 인생사진, 인생카페, 인생책 이것 외에도 넘쳐나는 인생 OO... 그중에서도 인생영화는 엄청 흔한 말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인생영화 있어?"
영화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영화를 공부하지 않아도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없어"
나는 매번 단호하게 말한다.
진짜로 없다. 의미를 두지 않는 성격은 아니다. 되려 없는 의미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편이다. 그렇게 만들어둔 의미들은 내 방 한편에 상자가 되어 쌓여 있기까지 한데? 그중에서도 인생 OO라고 부르는 건 없으니 인생영화가 없는 것도 당연하긴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영화 한 편 추천해 봐라 하면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한 5분 정도? 깊이 고민하면 몇 가지 영화가 떠오른다. 싱 스트리트, 립반윙클의 신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마루 밑 아리에티.... 공통점도 없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군...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씩 얘기해 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앞에 말한 영화들에 대해서 별로 그렇다 할 소감이나 감상은 없다. 생각난 이유만 몇 자씩 적어보려고 한다.
싱 스트리트
이 영화는 내가 굉장히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어디서 뭘 주숴듣고 다닌 건진 모르겠는데 저 영화가 보고 싶었고 그래서 봤고 한동안 영화에 나온 음악들을 자주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더랬다. 봐줄 만한 내용이었다. (이 글은 정확한 분석이나 평론에 대한 글은 아니니 그냥 이렇게만 적겠다.) 그래서 한동안 인생영화에 대해서 물으면 이 영화를 말해줬는데 당장 떠오르지는 않아서 인생영화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1순위로 생각하는 영화이지만 인생영화는 되지 못했다.
립반윙클의 신부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iptv에서 제공해 줬던 것 같다. 무료로 볼 수 있었고 엄마의 그냥 보기가 실천되면서 봤다. 이것도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다. 이 영화가 생각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영화 감상문이라는 것을 적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비평문을 써봐야지' 이런 생각도 없었고 그냥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적었다. 주인공이 계속해서 선택을 하고 어긋나고 들어맞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잔잔히 이뤄졌던 영화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감상문 첫 문장을 이렇게 써놨다. '주인공의 남편이 좀 달랐으면 어땠을까?'. 애석하게도 주인공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감상문을 쓴 노트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감상문을 처음 썼다는 것 자체에 이 영화가 기억에 남았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우리 엄마는 예술적인 것들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도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완전 예술영화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다른 상업영화에 비해서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설명하기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나는 한창 프랑스어 배우기에 빠져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던 시점과 맞물리는 것 같다. 뭐가 먼저인지는 기억이 안 나고 이 영화와 프랑스어 공부가 나에게는 어떤 열결고리다. 어설프게 배우고 그 상태를 방치해서 내 프랑스어 실력은 엉망이고 야매지만 이 영화만큼은 지겹도록 봤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이어질지도 대충 안다. 내가 이 영화의 분석문을 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분석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겨울 정도로 보고 있으니 지금 당장 영화 하나를 말해봐 하면 이 영화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선택 자체는 내가 원한 걸 고른 거니 이 영화도 어쩌면 인생영화 후보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루 밑 아리에티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어린이 시절에 지브리 작품을 매우 많이 보고 자랐다.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녀 배달부 키키 이런 굵직한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영화는 마루 밑 아리에티였다. 사람들의 물건이 꽉꽉 들어차 있는 아리에티의 방이 예뻐 보였던 것 같다. 캐릭터와 서사를 떠나서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런데 왜인지 우리 언니는 이 영화를 싫어했고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동안 숨기고 살았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좋아하는 지브리 영화에 항상 마루 밑 아리에티를 담아 두고 있었다.
인생영화가 되는 기준은 뭘까? 고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에게 인생영화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인생영화라는 표현보다는 좋아하는 영화 정도로 물어봤던 것 같다. 한 친구가 당당하게 해리포터가 자신의 인생영화라고 답했다. 매일 들고 다니는 usb에 해리포터 전 시리즈가 담겨있다고 하며 자랑까지 했다. 무엇이 하나를 그리도 열렬히 좋아하게 만드는 걸까? 덕질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빠순이짓을 해보지는 않았다. 타고나길 그렇게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도록 태어나지 않은 것 같다. 인생영화 추천 이런 걸 봐도 이 정도 영화가 인생영화가 되나?, 겨우 이 영화가 인생영화? 이런 생각도 자주 들었다. 내가 영화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접근하고 있는 걸까? 우리 가족들은 인생영화에 대해서는 다 나랑 비슷한 견해여서 인지 더 혼란스러워 지기만 한다. 인생영화는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나는 앞으로 인생영화라 부를만한 영화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