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테판의 세상
개봉한 지 18년도 더 지난 영화다. 네이버 시리즈온 서비스가 곧 종료된다길래 뭐라도 영화를 한편 사보고 싶어서 샀다. 왜 굳이 이 영화였냐 물으면 이 영화를 여기서 밖에 못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미루고 미루다 영화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소식에 별생각 없이 영구소장까지 해가면서 영화를 사봤다. 미셸 공드리 감독을 특별하게 애정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나에게 항상 흥미로웠고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5,500원이라는 금액을 들여 사게 됐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에는 그냥 마음이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했다.
스테판이라는 한 남자가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건너와 살게 되면서 옆집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랄까...? 그 안에서 스테판이 꾸는 꿈은 그의 무의식을 반영해 그의 심리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 가끔은 스테판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행동하기도 한다. 스테판의 엄마는 스테판이 어릴 적부터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사실 내용 자체가 그렇게 흥미롭고 집중이 되는 내용은 아니다. 여러 번 잠의 고비를 넘기면서 봤다.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지 못한다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내용을 놓쳤을 수도 있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유발하는 건 미셸공드리 감독의 아트 디렉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꿈속에서는 비현실적인 장치, 소품, 연출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런 연출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싱크태의 물이 셀로판지로 표현된다던가 창밖으로 던진 찬물에 사람이 얼어붙거나 뜨거운 물에 불타버리는 등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 요소는 영화를 보는 시청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이 좋았다. 애초에 영화를 보기 전부터 미셸 공드리는 그런 연출을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을 살피며 영화를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있음에도 아직 정식 교과목으로 기호학이나 연출분석을 공부해본 적이 없어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미셸 공드리 감독이 소품이나 오브제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미술세계는 꽤나 독창적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했던 공간은 스테판이 꿈을 만들어내는 꿈 공장(?)과 스테파니에게 보여준 텔레파시 헬멧이었다. 계란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방에 박스를 접고 이어 붙여 만든 방송용품들은 동화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장소라는 느낌을 주었다. 스테파니에게 보여준 헬멧은 사실 자전거 헬멧에 선을 붙여 만든 소품이겠지만 휘황 찬란해 보이거나 너무 차가워 보이는 느낌을 주는 기계보다 저런 소소한 뒤죽박죽 느낌을 주는 오브제가 영화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미장센은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미셸 공드리 영화를 볼 때 미적요소를 중심으로 보길 추천한다.
내용을 기대하고 본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할 실망이나 감탄의 표현은 굳이 더 남기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영화를 볼 때 나의 1차 목적이었던 미장센에 주의해서 보기를 실천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볼 날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구소장한 것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볼 때는 또 무엇을 중심으로 봐야 할지 고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