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서 고마워

내가 그토록 바랐던 아이는 로봇이었다

by 주현정

내가 먼저 부르기 전엔 결코 부르지 않는 아이.

지나간 자리에 장난감 허물 하나 남기지 않는 아이.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아이.

마치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 같은 아이.

이 아이는 어쩌면 내가 늘 바라는 그런 완벽한 아이의 모습이 아닐까!

‘아이 자판기’를 상상하는 순간, 엄마는 문득 멈칫했단다. ‘완벽한 아이’는 결코 나의 린이와 선이가 될 수 없음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기 때문이야.

오늘은 토요일.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날이지. 주말이면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을 뜨는 너희들이 집구석구석을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질러 놓았지만, 못 본 척 소파에 자리 잡고 읽고 싶었던 책을 폈단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 찰나의 평화를 놓칠 리가 없었어.


“엄마, 같이 놀아요!”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들려왔단다. 너희들은 수십 권의 그림책을 안고 달려왔고, 엄마의 책은 다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 우리는 조경희 작가의 《엄마 자판기》와 《아빠 자판기》를 펼쳤지. 지난번 선이가 재미있게 읽었던 걸 기억해 다시 빌려온 책말이야.


책 속 주인공, 신우는 바쁜 부모님에게 서운해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잠이 들었지. 다음 날, 정말로 부모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판기’만 남아 있었어. 게임맨, 슈퍼맨, 텐트맨, 피자맘, 놀이맘…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부모가 나타나는 세상에서 신우는 하루 종일 신나게 노는데, 그때 린이가 조용히 물었지.


“엄마, 그러면 아이 자판기도 있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상상에 빠졌다. 아이 자판기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순간, 스스로도 놀라 멈칫했단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늘 생각하던 ‘이상적인 아이’의 리스트가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단다.

‘혼자서 척척 숙제하고, 핸드폰 시간을 철저히 지키며, 동생과 다투지 않고 늘 고운 말투로 “네!” 하고 대답하는 그런 아이.’


하지만 곧 깨달았지. 그런 아이는 아이가 아니란 것을. 아이는 원래 엉망진창이어야 한단다. 넘어져봐야 일어서는 법을 배우듯, 울고, 떼를 쓰며 온몸으로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증명하는 존재여야 한단다. 나는 그 당연한 생명력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란다.


사실 엄마도 지칠 때가 있어. 주말엔 늦잠도 자고 싶고, 넷플릭스도 보고 싶고, 내 입에 맞는 밥을 편한 시간에 먹고 싶단다. 그래서였을까. 아주 잠깐,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아이가 튀어나오는 자판기를 바랐던지도 몰라. 그 생각이 참 부끄러웠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너희들에게 화를 냈던 수많은 순간 속에 내가 바랐던 건, 아이들이 아니라 ‘그 이상한 기계’였는지도 모르겠구나.


너희는 지금, 너희답게 아주 잘 자라고 있는데 말이야. 여전히 실수하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떼를 쓰기도 하고, 10분에 한 번씩 다투기도 하지만, 그 모든 소란함이 바로 ‘아이의 하루’라는 것을 이제야 본단다.

너희는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히 소중해. 온 옷에 슬라임을 묻혀 놓고, 가끔씩 소파 틈새에서 끈적한 사탕 조각이 발견되고, 벽지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작품(?)을 그려 놓기도 하지만, 괜찮아. 그게 내 딸. 린이, 선이니까.


어린 왕자가 사랑한 단 한 송이의 장미꽃처럼, 나에게는 이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단 둘 뿐인 린이 와 선이가 있어. 찡찡거리고 사고를 쳐도, 바로 그런 너희라서 엄마에겐 가장 소중해.


너희가 너무 완벽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야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테니까. 지금 모습 그대로 머물러주렴. 엄마는 이 순간의 너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단다.


아이 자판기 앞에 서지 않기로 했어. 대신 너희가 쏟은 물감 자국 옆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리기로 했단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버튼 하나로 나오는 완벽한 아이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서툴게 걸어가는 너희의 온기가 훨씬 더 달콤하단다.

"완벽하지 않아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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