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섞인 김치를 먹으며 우리는 웃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왜였을까. 나와 남동생은 언니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만 했다. 겨우 세 살 터울의 언니는 나의 부모요, 나의 집이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언니가 시집을 간다. 나의 울타리가 사라진다.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할까.
곰팡이 가득한 벽면으로 나 있는 하나의 창. 그 앞으로 100cm도 되지 않을 듯한 곳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하나뿐인 창문은 열 수 없는 것이 되었고, 1층에 위치한 우리의 보금자리는 곰팡이의 습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15평, 작은 원룸에 남동생과 언니 그리고 내가 복작복작 살았다. 언니는 일터에서 우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 나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학교’라는 곳에 다닐 수 있었다. 부모의 다툼이 지긋지긋했다. 이제 그만했으면 싶었다. 서로를 미워하고 탓하며 늘 으르렁거리는 부모의 모습을 매일 참아내야 하는 것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제발 이 고통이 끝나길 빌었다.
하늘은 나의 기도에 응답했고, 우리 부모는 그렇게 서로를 평생 미워만 하다 ‘이혼’이라는 끝을 맺었다. 엄마는 행방이 묘연해졌고, 아빠는 늘 그랬듯 여자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우리 삼 형제는 갈 곳을 잃었다. 아빠의 생각이었는지, 그 당시 아빠의 옆을 지키던 아주머니의 생각이었는지 우리에게 원룸 하나가 떨어졌다. 그곳은 우리의 집이 되었고,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를 떠났다.
그렇게 우리의 막막한 삶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삶이. 언니의 월급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창 먹을 나이인 남동생의 소원은 통닭 한 마리를 혼자 다 먹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먹을 것에 집착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당시의 나이로 가능한 일들을 모조리 했다. 다행히 외적으로는 이미 성인의 몸을 하고 있었기에 나이를 속이고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교복을 벗고 호프집으로, 고깃집으로 나를 불러주는 어떤 곳에서도 일을 했다. 나이를 속이지 않아도 당당히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 남동생은 오락실에서 동전을 바꿔주는 일을, 나는 문구점에서 그 당시엔 없었던 지금의 CCTV를 대신하는 ‘인간 CCTV’ 알바를 했다.
좀도둑이 많은 문구점에서 큰 키를 이용해 매의 눈으로 훔쳐가는 이가 있는지 살피고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나의 신체 조건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맞춤 알바였다. 인간 CCTV라니. 모든 것이 AI에 의지하는 지금 시대에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알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월급날이 되면 우리는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다. 피자를, 통닭을……. 무조건 크고 양이 많은 음식을 주로 먹었다. 1+1 피자를 먹으며 행복했고, 내 월급으로 언니와 동생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날만을 학수고대했다.
쌀이 떨어져 김치만으로 배를 채웠던 날이 생각난다. 그것도 중국산이었다. 배추 한 포기마다 빠지지 않고 벌레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었다. 어떤 것은 작은 날파리 같았고, 또 어떤 것은 다리가 아주 긴 모기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김치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니 어찌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비록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높은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고, 겨울이면 창문으로 외풍이 들어 신문지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초라한 곳이었지만. 외진 곳에 있던 탓에 술주정뱅이 아저씨들의 고성방가를 피할 길이 없었던 작디작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 나의 언니가 시집을 간다니. 영원히 이렇게 살 것만 같았던 내 인생의 일부분이 이제는 떨어져 나가야 한다니. 앞이 막막해졌다. 그렇다고 어찌 그 앞을 막고 섰겠는가. 언니의 행복을 빌어 줄밖에.
지지리 궁상이던 우리 형편에 혼수가 웬 말이었겠는가! 다행히 형부는 언니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했고, 덤으로 딸려 있는 혹 같던 그녀의 두 동생에게도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언니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언니에게 ‘비상금 통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일을 했지만 우리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본인은 알뜰히 돈 한 푼 모아두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빈손이 너무나 허망하여 그 손에 무어라도 쥐여 주어야 했다.
결혼 소식을 듣고부터 받는 월급을 모조리 모았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몇백만 원을 언니의 텅 빈손에 쥐여 주었다. 형부 몰래 숨겨 두었다가 너무 힘이 들 때 꺼내 쓰라는 편지와 함께. 기대하지 않았던 통장을 받고 언니는 참 오랫동안 울었다. 그 눈물이 혼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흐르는 것인지, 흥청망청 돈을 쓴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동생에게 감동한 것인지, 혹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이 이제는 군대에 간다. 열 수 없던 창문 대신, 언제든 바람이 드나드는 넓은 창이 있는 ‘형부’라는 울타리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는 언니가 있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형부는 여전히 언니를 천사라고 부른다. 단, 술을 마셔야 그렇게 부를 용기가 나는 듯하지만 말이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알콩달콩 살아가는 언니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 시간의 힘듦을 보답받는 듯하다.
큰 키를 이용해 매의 눈으로 훔쳐가는 이를 살폈던 나의 시선은, 이제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눈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배가 고팠던 당시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내 기억 한편을 채워주고 있다. 이러니 어찌 과거를 탓하며 살겠는가. 지나고 나니 이토록 행복한 기억이 되어버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