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실천의 도구'

by 박대영


강원도의 움막에서 어설픈 농부 흉내를 내면서 깨닫는 바는 몸으로 행하는 일의 정직함입니다. 비록 조그만 텃밭이고, 아담한 몇 개의 이랑을 가꾸는 일이 농부로소의 제 역할의 전부이지만 몸을 움직여 땀으로 땅을 적셨을 때 작물은 풍성한 결실로 나와의 교감에 화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채소들이 푸른 잎을 내어놓는 일도,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고, 긴 팔을 뻗어 하염없이 널브러진 줄기 곳곳에서 호박이며 오이, 수박 같은 열매가 영그는 일도 보살피는 농부의 서툰 몸놀림이라도 보태야 그들이 제 자리를 잡고, 잡초에 부대끼지 않으면서, 목마름이라도 덜 수 있으니 말입니다.


특히 밭이며 마당 곳곳에서 준동하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시골살이를 하며 몸으로 행하는 여러 고달픈 일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것입니다. 자고 나면 무성해지는 풀들의 생명력은 참말로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호미와 더불어 춤 한번 추고 나면 말끔한 밭과 마당으로 돌아오니 그 정직함에 놀랄 때가 여러 번입니다.


보이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나도 은근슬쩍 변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몸을 통과해서 나오는 숱한 느낌들, 그리고 감정들은 진솔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머리로, 입으로만 짓까불며 쏟아냈던 많은 말들이 새삼 부끄러움이 되어 뒤통수를 칩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실천이면서, 행동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결국 실천이라는 행동을 몸으로 실행할 때, 그 몸의 행위와 언어와 태도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면서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시인들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시어는 몸을 뚫고 나온다고 합니다. 몸이 겪어낸 땀과 눈물, 그리고 삶의 생채기들이 시가 되고 작품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 이유로 소설 <좁은 문>을 쓴 앙드레 지드는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다. 감각으로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상상력과 공감마저도 체험이라는 덤불 속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고는, 경험이라는 체에 걸러지지 않고는 상상도, 공감도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론 없는 체험은 내실이 없어 위험하고, 체험이 없는 이론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지 않아서 공허하다’고 하나 봅니다.

작금의 시대는 흔히 ’입벌구(?)’가 넘쳐나는, 말만 앞서는 소음의 시대라 일컬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겁니다. 정치인들이 내는 소음은 듣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괴성이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고, 언론이나 SNS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말들 역시 시끄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모두가 떠들지만 그저 소음으로 허방의 공간을 떠돌며 자신의 이익만 탐할 뿐입니다.


김선우 시인은 “몸이 없는 성자를 믿지 마라 / 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봄마저도 물오른 앳된 몸으로 오건만, 하물며 세상을 밝히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입벌구여서야...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수가 유대 경전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낮은 곳의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고민하고, 또 헤아리며 그가 품은 사랑의 깊은 뜻을 행동과 복음으로 보여주신 이유는 사랑마저도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노숙인의 삶을 산 까닭도 거리에, 낮은 곳에 그가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자칫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서 고루해지기 십상입니다. 꼰대가 되는 것, 한 순간입니다. 행동과 실천은 마지막 그날까지 꾸준할 때 경륜이 되고,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려야 할 것은 ‘라떼’이고, ‘왕년’ 타령입니다.

삶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살아감이자 살아냄의 기록입니다. 그 기록들 속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은 몸으로 실천한 자신의 기록들이겠지요. 나아가 몸의 행위를 통해 깨달은 자신만의 성찰과 각성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습니다. 길 위에서 만날 그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배우며 성장하는 나를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아마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